5년 전 평양에서의 약속은 사실상 휴지 조각이 됐다. 남북이 서명한 ‘역사적인 판문점 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분야 합의서’(9·19 군사합의)와 현실은 달랐다. 북한의 위반이 잇따르고 이에 우리 정부가 강력대응 의지를 밝히면서 합의는 사실상 무용지물이 됐다. 정부와 여권에서는 "9·19 합의 파기를 준비해야 한다"는 주장이 속출하고 있다.
2018년 9월 19일 당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평양공동선언의 부속합의서로 9·19 군사합의를 이끌어 냈다. 지상, 해상, 공중 등 모든 공간에서 무력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일체의 적대행위를 전면 중지하는 내용이 골자다.
하지만 이듬해 북한이 먼저 도발에 나섰다. 2019년 11월 23일 북한 서해 창린도 일대에서 북방한계선(NLL) 이북 해상적대행위 중단구역으로 해안포를 쐈다. ‘2022 국방백서’에 따르면 이를 시작으로 북한이 9·19 군사합의를 명시적으로 위반한 사례만 5년간 17건에 달한다. 2020년 5월에는 중부전선 우리 군 GP(전방감시초소)로 총격을 가했고, 지난해에는 10월 14일부터 24일까지 11일 동안 9차례에 걸쳐 NLL 인근 해상완충구역에 방사포를 발사했다.
북한은 정전 이후 처음으로 우리 영해 인근 공해상에 미사일을 발사하기도 했다. 또 지난해 12월 26일 소형 무인기를 군사분계선(MDL) 너머로 날려 보내 용산 대통령실을 위시한 서울의 비행금지공역(P-73)을 침범했다. 국방부는 “해안포 포문 개방, 포구 덮개 미실시 등 기타 위반사례도 다수 발생했다”고 밝혔다. 더 이상 합의라고 보기 어려운 상태다.
이에 통일부 당국자는 19일 “남북 간 합의는 상호 존중하며 지켜져야 한다”며 “우리만 일방적으로 지키고 북한은 지키지 않는 합의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향후 한반도 정세를 주시하면서 필요하다고 판단할 때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윤석열 대통령은 앞서 1월 “북한이 다시 우리 영토를 침범하는 도발을 일으키면 9·19 군사합의 효력정지를 검토하라”고 지시한 바 있다.
특히 신원식 국방부 장관 후보자가 9·19 합의 폐기를 주장하면서 이제 '파기 선언'만 남았다는 관측이 힘이 실리고 있다. 신 후보자는 15일 기자들과 만나 “개인적으로 9·19 군사합의는 우리 군사적 취약점을 확대하는 것으로, 반드시 폐기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며 “전반적으로 보고 추가 보완할 것이 있으면 최단 시간에 보완하겠다”고 말했다.
여당도 동조하는 모습이다. 국회 국방위원장인 한기호 국민의힘 의원과 대한민국수호예비역장성단은 이날 국회 기자회견에서 “문재인 정부 5년간 가짜 평화에 매달리다 북한이 핵과 미사일을 고도화하는 시간만 벌어준 셈”이라며 “더 이상 9·19 합의로 대한민국의 국방과 안보가 붕괴되는 참담한 현실을 좌시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처럼 9·19 합의가 무력화됐지만, 우리가 선제적으로 합의를 파기하기에는 위험이 적지 않다. 북한은 지난 4월 이후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통신선은 물론 동·서해 군 통신선을 단절했다. 이런 상황에서 9·19 합의를 우리가 먼저 파기한다면 NLL 및 접경지역의 우발적 충돌을 관리할 수단이 없어진다.
1972년 ‘7·4 남북 공동선언’ 체결을 시작으로 200여 건의 남북 합의서를 체결했는데, 정부가 먼저 파기한 전례가 없는 점도 부담이다. 이에 신 후보자는 “국방부 단독으로 (9·19 합의 폐기) 의사결정을 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단서를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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