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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위 따윈 두렵지 않다네!”

입력
2023.09.16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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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스 프리즘] 박선철 한양대 구리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그녀는 마흔을 바라보는 ‘알파걸’이다. 그런데 그녀의 약점은 바로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는 것이다. 평소에는 참 예의 바르고 조용한 사람인데 불같이 화를 내고 나면 주변에서 불편해하는 기색을 느낀다.

그러고 나면 너무 창피하고 부끄러워한다. 그리곤 또 화를 내면 어떻게 하나 전전긍긍한다. 그녀는 유년기에 어머니로부터 구박을 많이 받았다. “넌 애가 왜 그 모양이야?” 화가 나고 억울하지만 참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불쑥 분노가 튀어나오기도 하고 어머니로부터 받았던 얼마 되지 않는 관심마저 잃으면 어떻게 하나 조마조마하며 지냈다.

필자가 초등학생 딸아이 덕분에 뜻하지 않게 반복해 보게 된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하나 있다. 바로 ‘겨울왕국(Frozen)’이다. 그 주제가가 이제는 너무나도 많이 알려져 있어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인데, 바로 ‘Let it go!’다. 여기서 잠시 추가적으로 설명하면 ‘Let it go!’의 정식 한글 번역은 ‘다 잊어!’다.

의미나 운율 모두를 고려한 것이겠지만 필자 생각으로는 ‘다 잊어!’보다는 ‘지금 이대로도 괜찮아!’가 그 의미를 더 정확하게 전달해주는 것 같다. 그래서 한글 제목인 ‘다 잊어!’가 아니라 영문이지만 ‘Let it go!’로 표기하는 것에 독자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주제가 ‘Let it go!’에는 마치 알파걸인 그녀를 위해 준비된 듯 한 의미심장한 가사가 있다. 성현의 금언에 버금갈 정도로. ‘돌아가지 않을래! 과거는 과거야!(I’m never going back! Past is in the past!)’

주인공 엘사는 마법을 통제하지 못해 주위를 놀라게 한다. 그래서 혹여 자신의 마법이 자기 모습이 남들에게 드러날까 불안해하며 나서기를 두려워한다. 그렇지만 어느 시점에 이르면 ‘과거는 과거야!’라고 당당히 외친다. 전치사 ‘in’에 담겨있는 함의처럼 엘사는 과거는 과거 속에 머물러 있을 뿐 현재에 영향을 주지 못함을 깨달은 것이다.

과거 경험 속 감정에 휩쓸려버리면 지금의 마법을 부정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제 엘사는 새로운 관점을 통해 더 이상 마법을 감추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마법을 자신의 일부로서 당당히 인정한다. 그리곤 마법을 조절을 넘어 숙련에 이르게 하고 그 마법을 통해 가족을 구해낸다. 엘사가 마법이라는 자신의 특징을 저주가 아닌 재능으로 바라보았기에 가능했으리라.

마틴 스코시즈라는 미국 영화감독이 있다. 우리에겐 영화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이 2021년 아카데미상을 받았을 때 수상 소감에서 경의를 표해 화제가 되었던 ‘노감독’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당시 스코시즈의 천진난만한 아이 같은 표정이 인상적이었다.

한데 스코시즈의 유년기는 험난했다. 영화감독이 된 이유를 가톨릭 신부가 되기에는 너무 속물이었고 깡패가 되기에는 너무 선량했기 때문이라고 스스로 밝혔을 정도로. 스코시즈는 다혈질이었는데 ‘젊은 시절’ 통화 중에 친구와 다투다가 전화기를 부숴버리고 이내 공중전화를 찾아서 연이어 또 다투기도 했다는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젊은 시절 스코시즈의 열정은 격렬했지만 조절되지 않았다.

하지만 필자는 생각한다. 스코시즈의 분노가 일상에서는 받아들여지기는 어려운 것이지만. 자기 혐오나 자기 연민의 덫에 갇히게 하는 것이지만. 역설적으로 그 열정이 창작의 근간이 되었을 거라고. 다만 전화기마저도 부숴버리는 분노가 뛰어난 영화를 제작해내는 예술성으로 전환되기까지 부단한 ‘자기 반성’이 있었을 것이다.

잠시 삼천포로 빠지면 다산 정약용은 다음과 같이 말씀했다. “성을 내는 것은 쉽다. 참고 넘기는 것도 어렵지 않다. 하지만 낮은 목소리로 분노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

알파걸인 그녀는 자신의 분노를 인정하지 못하고, 엘사는 자신의 마법을 부끄러워하고, 스코시즈 감독은 전화기를 부숴버리고도 또 말다툼을 하지만. 필자는 그 열정 속에 담겨 있는 그리고 아직은 서투른 창조력을 바라보았으면 한다.

그 열정이 지금 당장을 자신을 몹시도 괴롭히는 것이지만. 다산의 말씀을 통해 끊임없이 자기 반성을 반복한다면 그 열정이 자신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을 응원하기에 이를 것이다.

‘Let it go!’의 마지막 가사는 감동적이다. 이 가사를 표현하는 순간 엘사의 표정이 정말 멋지다! 스코시즈가 지은 천진난만한 아이의 표정과도 겹쳐지는 듯 한데 언젠가 그녀가 지을 표정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믿는다. “추위 따윈 두렵지 않다네!(The cold never bothers me anymore!)”

박선철 한양대 구리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박선철 한양대 구리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권대익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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