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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협박받는 AI가 아니다

입력
2023.09.03 22:00
수정
2023.09.04 09:24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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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호(오른쪽 두 번째)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교권보호 관련 법안의 추진을 위해 열린 여·야·정 시도교육감 4차 협의체 2차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뉴스1

이주호(오른쪽 두 번째)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교권보호 관련 법안의 추진을 위해 열린 여·야·정 시도교육감 4차 협의체 2차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뉴스1

학교를 지키는 선생님들의 처지가 눈물겹다는 이야기는 이제 새삼스럽지 않다. 지난해 내가 들은 이야기는 평범한 공립중학교에 다니는 평범한 아이가 한 말이라 놀라웠다. 아이는 학교에서 제멋대로 굴었는데 선생님이 나무라자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의 태도는 왜 이래요? 선생님도 가정교육이라는 걸 받았을 거 아녜요?”

이런 아이에게 벌을 줄 수도, 호통을 칠 수도, 조용한 훈육을 받아들이게 할 수도 없으니 무슨 수로 가르칠 수 있을까? 자칫하다가는 선생님이 아동학대범으로 몰리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보다 훨씬 심한 경우를 숱하게 보고 듣는다. 아이들이 이름을 가리고 쓴 ‘교원 평가’의 심한 사례들을 보면 비속어와 막말, 성희롱까지 있어 차마 인용도 할 수 없고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여름 내내 뙤약볕이 내리쬐는 서울 곳곳의 아스팔트에 주저앉아 집회를 연 선생님들의 담담한 하소연을 들어보면 눈물이 저절로 흐른다. 후배 교사가 수업 중에 소리 지르고 발길질한 아이를 올바르게 지도했는데도, 학부모가 찾아와 소란을 피웠다고 한다. 급기야 국가인권위원회와 국민신문고 교육청에 거짓말로 민원을 냈다. 시달리다 못한 선생님이 병가를 내면서, 얼마 전 생을 마감한 후배 교사를 떠올렸다. 소설로 써도 진실성이 의심받을 정도의 참담한 현실이다.

조금만 들어도 앞뒤가 안 맞는 ‘스쿨 미투’로 억울한 누명을 썼는데도, 교육청이나 학교에서 누구 한 사람 학생들의 거짓말을 조사해 보는 일이 없다. 결국 재판까지 가서 몇 년을 시달리며 극단적인 선택을 고민한 선생님은 어떻게 위로받을 수 있을까?

젊은 시절 읽은 ‘페다고지’에서는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키는 교육자가 되기를 주문했는데, 이제는 선생님들이 억압받는 이들이 되어 모진 굴레를 벗겨 달라고 투쟁하고 있다니.

그 굴레를 만든 법과 제도의 오류를 고칠 몇 가지 개선책이 조만간 있을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으로 선생님들의 숨통이 온전히 트일 것으로 생각지는 않는다. 선량하고 반듯한 선생님들을 괴롭혀 온 굴레는 그런 법과 제도에도 있지만, 무엇보다 사람, 특히 상식 밖의 언행을 해온 몇몇 학부모들이 만들어 왔다는 생각 때문이다.

저급한 싸움꾼 기질이 몸에 밴 막장 부모, 어깨와 안구에 힘깨나 주고 사는 갑질 부모. 이런 부류가 저지른 못된 행태들이 선생님들을 죽음에까지 몰고 갔는데, 그 바닥을 생각해 보면 다름 아닌 ‘가정교육’이 있다고 생각한다.

가정교육은 사실 우리 삶의 기본이다. 부모의 부모로부터 흘러나와 자식의 자식에게로 끊임없이 흘러간다. 그 수원지는 지금까지는 유교였다. 우리 지폐와 동전에는 이황과 이이, 세종대왕과 이순신, 그리고 신사임당이 새겨졌다. 태극기는 공자가 책 끈이 몇 번이나 끊어지도록 읽었다는 주역의 세계를 담았다. 우리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결국 유교라는 기단 위에 세워졌음을 말해준다.

그간 우리의 시간은 유교의 가르침으로 나라를 일구고, 유교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애써 온 것이 아니었을까? 끊임없는 정치적 항쟁과 이어진 노력으로 우리 사회는 유교적 권위주의에서 상당히 진화했지만 여전히 모순과 굴레가 많은 것은 새로운 사상이 아직 나타나지 않아서가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상당 기간 ‘상식’을 기본으로 삼아 살아가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해 보는 것이다.

선생님들은 더 이상 군사부일체의 존재도 아니지만 막말과 협박을 받아내는 인공지능 같은 존재도 아니다. 몇몇 학부모들은 항의에 앞서 내 언행이 과연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인지, 나의 ‘가정교육’에는 도움이 되는지 상식에 기초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격려와 훈육을 천직으로 삼은 선생님들은 세상의 존중을 받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한 세대 전에 교육 현실에 분노한 서태지의 ‘교실 이데아’에 공감한 기억이 있다. “니 아부지 뭐 하시노” 하던 영화 ‘친구’ 속 선생님이 휘두른 매질에 씁쓰레한 기억도 있다. 하지만 인재를 기르는 일만이 살길인 나라에서 그 노래, 그 영화와는 다른 선생님들이 ‘인생을 갈아 부어서’ 일궈 온 나라가 우리나라다. 나는 그런 사례들을 숱하게 알고 있다.

어릴 적 시장 같은 데서 선생님을 만나면 좀 어색했다. 선생님은 학교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선생님이 더 이상 죽지 않고, 학교를 지켜주는 ‘교육의 영혼’이 될 수 있도록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권기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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