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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도 가까운 타인

입력
2023.08.31 22:0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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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 진열된 책들. 게티이미지

서점에 진열된 책들. 게티이미지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나 싶지만, 예전에는 책의 외형적 상태를 집착 수준으로 중요하게 여겼다. 서점에서 책을 고를 때 매대 맨 위에 놓인 책을 조심히 펼쳐보고선 마음에 든다 싶으면 그 아래에 놓인 책들의 상태를 살핀 후 가장 흠이 덜한 책을 골라 구매했다. 구매하고서도 책 결벽은 계속돼서, 책을 최대한 상하지 않게 다뤘다. 어차피 시간 지나면 상할 건데 그렇게 유난 떨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그랬다. 그런데 지금은, 웬만해선 서점에서 처음 집어 들었던 책을 구매하려고 한다. 책을 애지중지하던 세월이 더 길어서인지 한편으론 마뜩잖아도 책방을 해보고 나니 아무래도 과거의 내가 좀 얄밉다는 생각에서다.

내 책방은 책을 야외에 놓고 판매한다. 깨끗한 책에 집착하는 내게 이것은 해결해야 할 숙제였다.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은 매대에 책을 한 권씩만 놓고 나머지 재고는 내부에 보관했다가 손님이 책을 골랐을 때 새 책을 꺼내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심각한 파손이 있거나 샘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면 책방에 들어온 책은 모두 판매용이고, 책을 들여올 때부터 완벽히 흠 없는 책을 받을 수는 없어서 조금 흠 있는 책을 손님께 판매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러면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어려운 마음이 된다. 미안한 기색으로 할인을 해드릴 수 있다고 말하면 보통은 오히려 좋다는 반응을 보인다. 어떤 손님은 새 책이 있는데도 진열된 책을 가져가고 싶다고 말하기도 한다. 책방지기인 나를 배려해서 그렇게 하는 손님도 있고, 정말로 본인이 사용감이 느껴지는 책을 좋아해서 그런다는 손님도 있다. 책 고르는 것만 봐도 사람들은 참 각양각색이다.

멀게만 느꼈던 타인의 상황에 놓여보는 경험은 종종 내 시야를 바꾸거나 넓혀 왔다. 카페 아르바이트를 해보고 나서야 감정 노동의 애환에 공감했고, 자영업을 하고서야 자유란 무수한 선택을 위한 부지런함 없이는 얻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인도 위의 풀들을 정리하는 사람들을 보고 나서야 누군가 인도를 정리했기 때문에 깔끔한 인도를 밟고 걸어 다닐 수 있다는 걸 알았을 땐 뭐랄까, ‘나는 정말 애송이구나’ 싶었다.

반면에 영영 직접 겪을 수 없는 것도 있다. 예컨대 남성이라면 여성의 출산을 직접 겪을 수 없고, 인간이 비인간 동물의 삶을 살아본다거나 장애인이 비장애인의 삶을 오롯이 겪을 확률은 희박하다.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일은 어쩌면 영영 완벽할 수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겪을 수 없는 다른 세계를 간접경험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무수한 표현과 예술을 들여다보는 것일 테다. 그 경계에 조금이라도 닿고자 하는 노력이 분명 더 많은 존재들의 행복을 위한 일이라고 믿는다. 자신은 언제나 타인이 될 수 있고, 타인도 언제나 자신이 될 수 있으니까.

아마 책방을 운영해 보지 않았다면, 나는 아직도 깨끗한 책만을 사고 싶어 했을 것 같다. 책을 유통하는 사정이나 다양한 취향 같은 건 모른 채. 하지만 알고 난 후에는 ‘깨끗한 책을 갖는 일이 과연 타인의 불편을 지나칠 만큼 내게 중요한 일일까?’ 스스로 물었다. 답은 ‘아니’였다. 작은 흠이 책의 내용까지 흠내지는 않고, 책의 본질을 결정하는 건 외관보다 내용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또 어떤 새로움이 있을지, 내가 알고 있는 건 얼마나 적을지. 꾸준히 알아내고 질문하고 답하리라 심심한 다짐을 해본다.


김예진 북다마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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