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도입된 배기가스 초저배출구역
'통행료 2만원' 런던 전역으로 확대 적용
빈곤층 타격… 정치권, 정쟁화 부추겨
최악의 스모그로 악명 높았던 영국 런던이 전 세계에서 가장 야심 찬 대기질 개선 정책을 도입했다. 배기가스를 많이 내뿜는 노후 공해 차량에 일종의 통행세를 물리는 초저배출구역(ULEZ)을 런던 전역으로 확대하면서다.
'숨 잘 쉬는 도시'로 거듭나려는 런던의 시도는 시작부터 거센 반발에 직면했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이후 두 자릿수 물가상승률에 신음하는 빈곤층 반발이 강력하다. 정쟁에 활용하려는 정치인들과 기후변화 회의론자까지 가세해 논란을 부추긴다.
"깨끗한 공기 마실 권리 누려야"
AP통신에 따르면 2019년 4월 이후 런던 도심에만 적용해 온 ULEZ가 29일(현지시간)부터 런던 32개 자치구 전역으로 확대됐다. 2006년 이전 생산된 휘발유차나 2016년 9월 이전 제작된 디젤차는 런던을 드나들려면 매일 12.5파운드(약 2만 원)를 내야 한다. 미납 시 벌금은 180파운드(약 30만 원)에 달한다.
야당인 노동당 소속인 사디크 칸 런던시장은 영국 B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어렵지만 매우 중요하고 올바른 결정이었다"며 "깨끗한 공기를 마시는 건 특혜가 아닌 권리"라고 강조했다. 2021년 재선에 성공한 칸 시장은 2030년까지 탄소 제로 달성('넷제로')을 두 번째 임기의 핵심 과제로 내세웠다.
런던시는 △매년 시민 4,000명이 대기 오염으로 인해 조기사망하고 △2050년까지 시민 55만 명이 대기 오염 관련 질병에 걸릴 수 있다고 경고한다. 런던의 대기질은 세계보건기구(WHO)의 가이드라인에 미달한다.
지난 4년간 런던 도심에서 시행된 ULEZ는 질소산화물 배출량 240톤을 감축하는 등 대기질 개선에 성과를 냈다(런던교통공사 통계). 이에 칸 시장은 지난해 11월 런던 전역으로 확대를 발표했다.
이는 세계적 흐름이기도 하다. BBC에 따르면 프랑스 파리는 친환경 기준에 미달하는 차량의 시내 통행을 제한하고 있으며, 스페인 마드리드와 노르웨이 오슬로도 '배기가스 배출 제로 구역'을 운영 중이다. 유럽연합(EU)은 2035년부터 휘발유·디젤 등 내연기관차를 사실상 시장에서 퇴출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새 차 살 능력 없는 빈곤층 타격
기후변화 속도에 발맞추려면 빠른 대응이 요구되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다. "역사의 옳은 편에 섰다"는 항변에도 불구하고 칸 시장은 "운전자들에게 전쟁을 선포했다"는 비판의 중심에 서 있다고 영국 인디펜던트는 짚었다. 연비가 좋은 새 차를 뽑거나 벌금을 낼 돈이 없는 도시 외곽 거주 빈곤층이 직격타를 맞은 탓이다. 지난해 9월 40년 만의 최고 기록을 쓴 물가상승률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15년 이상 된 '푸조 106 랠리'를 모는 폴 터커(52)는 "출퇴근을 하려면 차가 필요한데 당장 차를 살 돈이 없어서 대출을 받아야 한다"며 "ULEZ 때문에 빚을 져야 한다"고 했다. "가장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로부터 현금을 빼앗는 것", "가난한 사람들을 더 가난하게 만들 것"이라는 지적도 잇따른다. 런던시는 노후 차를 폐차하면 최대 2,000파운드(약 335만 원)까지 보조금을 지원하겠다고 밝혔지만 충분치 않다는 반응이 많다.
"선거 승리 위해서라면" 정쟁에 악용돼
정치권은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 지난 7월 런던 서부 억스브리지에서는 여당인 보수당 소속 보리스 존슨 전 영국 총리가 '파티 게이트'로 의원직을 사퇴하면서 보궐선거가 치러졌다. 노동당의 무난한 승리가 점쳐졌지만 보수당이 뜻밖의 승리를 안았다. ULEZ 반대를 전면에 내건 보수당의 전략이 통한 것이다. 이후 리시 수낵 영국 총리까지 "나는 운전자 편"이라면서 ULEZ 공격에 나섰다. ULEZ는 존슨 전 총리가 런던시장 시절 입안한 정책이지만 보수당은 정쟁에 몰두했다.
기후변화 회의론자까지 반대에 가세했다. ULEZ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를 부수고 다닌니는 '블레이드 러너'라는 이름의 자경단도 등장했다. 런던광역경찰청에 따르면 이들이 파괴하거나 훔친 카메라는 300대 이상이다.
칸 시장과 ULEZ 지지자들은 "극단주의와 음모론자에게 이용당하고 있다"고 비판할 뿐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는다. AP는 "이들은 시간이 지나면 반대 여론이 사그라들 것을 기대하지만 내년 총선의 핵심 이슈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토니 트래버스 런던정경대학 교수는 "자동차 사용과 개인의 자유는 파급력을 갖는 이슈"라며 "총선에서 정치적 분열을 야기하는 쟁점으로 악용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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