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부가 28일 “홍범도 장군이 1921년 소련 자유시로 이동한 후 보인 행적과 관련해 독립운동 업적과는 다른 평가가 있다”고 밝혔다. 홍범도 장군 흉상은 육군사관학교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거센 논란에도 불구하고 국방부가 흉상 이전을 본격화한 셈이다.
국방부는 이날 이메일로 공지한 입장문을 통해 “육사의 전통과 정체성, 사관생도 교육을 고려할 때 소련공산당 가입 및 활동 이력 등 논란이 있는 홍범도 장군의 흉상이 육사에, 더욱이 사관생도 교육의 상징적 건물인 충무관 중앙현관에 있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논란이 있어 왔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육사 내에 설치할 당시에도 적절하지 않다는 문제 제기가 있었으나 충분한 공감대 형성이 없이 강행됐다”고 덧붙였다. 홍범도 장군 흉상은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18년 3월 설치했는데 전임 정부가 무리하게 사업을 밀어붙였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국방부는 “홍범도 장군이 항일무장투쟁을 통해 독립운동을 한 업적은 부정할 수 없으며, 정부도 이를 인정해 1962년 건국훈장을 수여했다”며 “국방부가 이를 폄훼하거나 부정할 의도는 전혀 없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홍범도 장군이 1921년 소련 자유시로 이동한 후 보인 행적과 관련해서는 독립운동 업적과는 다른 평가가 있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홍범도 장군이 △소련 공산당 군정회의를 중심으로 하는 독립군 통합을 지지했고 △자유시 참변재판에 재판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자유시 참변 발생 후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여 소련 적군 제5군단 소속 ‘조선여단’ 제1대대장으로 임명된 역사적 사실이 있다는 것이다. 국방부는 또 홍 장군이 △1922년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이 개최한 ‘극동민족혁명단체 대표대회’에 한인대표 52명의 일원으로 참석했으며 △그해 레닌으로부터 권총, 상금, 친필 서명된 ‘조선군대장’ 증명서를 접수했고 △1927년에는 소련공산당에 입당하는 등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 존재한다고 덧붙였다.
국방부는 “북한의 김일성이 소련 공산당의 사주를 받고 불법 남침하여 6ㆍ25전쟁을 자행한 엄연한 사실을 고려할 때 공산주의 이력이 있는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육사에 설치하여 기념하는 것은 육사의 정체성을 고려 시 적절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문제를 이념전쟁으로 부추겨 정치 쟁점화하는 현 상황을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홍범도 장군의 흉상은 육사 교내보다는 독립운동의 업적이 가장 잘 선양될 수 있는 독립운동의 성지인 독립기념관에 모시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해 국가보훈부와 독립기념관에 협조를 요청했다”고 설명했다.
육사의 홍범도 장군 흉상 관련 국방부 입장(전문)
이번 독립운동가 흉상 이전을 둘러싼 논란이 발생한 것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함.
육군사관학교는 공산주의 북한의 침략에 대비하여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한 호국간성을 양성하는 기관임. 6·25전쟁 발발 당시 육사 선배님들은 전선에 투입되어 북한 공산군에 맞서 싸웠고, 6·25전쟁 기간에 다시 개교하여 지금까지 북한과 공산주의 위협에 맞서 왔음. 육사의 전통과 정체성, 사관생도 교육을 고려할 때 소련공산당 가입 및 활동 이력 등 논란이 있는 홍범도 장군의 흉상이 육사에, 더욱이 사관생도 교육의 상징적 건물인 충무관 중앙현관에 있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논란이 있어 왔음.
이 사안은 육사 내에 설치할 당시에도 적절하지 않다는 문제 제기가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범도 장군 흉상 설치가 충분한 공감대 형성이 없이 강행되었으며, 이후에도 지금까지 이에 대한 논란이 지속되어 오고 있음.
육사는 2022년부터 학교종합발전계획을 마련하면서 우리나라의 국난극복사, 6·25전쟁 영웅, 육사의 표상, 한미동맹의 가치와 의의를 함께 기리는 방향으로 교내 기념물 재정비 방안을 검토하고 있음. 이러한 검토과정에서 논란이 되어 왔던 홍범도 장군의 흉상은 육사 교내보다는 독립운동의 업적이 가장 잘 선양될 수 있는 독립운동의 성지인 독립기념관에 모시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하여 국가보훈부와 독립기념관에 협조를 요청하였음.
홍범도 장군께서 항일무장투쟁을 통해 독립운동을 하신 업적은 부정할 수 없으며, 정부도 이를 인정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을 수여하였음. 국방부가 이를 폄훼하거나 부정할 의도는 전혀 없음. 하지만, 장군께서 1921년 소련 자유시로 이동한 이후 보이신 행적과 관련해서는 독립운동 업적과는 다른 평가가 있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임.
홍범도 장군이 소련공산당 군정의회를 중심으로 하는 독립군 통합을 지지했고, 소련 공산당의 자유시 참변재판에 재판위원으로 활동한 사실, 자유시 참변 발생 후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여 소련 적군 제5군단 소속 ‘조선여단’ 제1대대장으로 임명 등의 역사적 사실이 있음. 이로 인해 1921년 6월 러시아공산당 극동공화국 군대가 자유시에 있던 독립군을 몰살시켰던 자유시 참변과 연관되어 있다는 의혹이 있음.
구체적으로, 1991년 한·소 수교 직후 발굴한 소련 측 정부문서에 따르면, 홍범도 장군이 1930년대에 소련 정부로부터 연금을 받기 위해 작성한 이력서에 “자유시 유혈사태에 대해 보고하기 위해 한인 빨치산 지대 대표단원 자격으로 레닌 동지를 만나러 모스크바로 갔다”고 되어 있다는 것임. 자유시 참변사태는 1921년 6월에 자유시에서 무장해제를 거부한 독립군이 공격당한 사건을 말하는데, 홍범도 장군은 순순히 무장해제하는 편에 섰다는 평가임. 이때 독립군 측이 400명에서 600명까지 사망하였고, 약 500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고 하는데, 당시 홍범도 장군이 독립군을 재판하는 위원으로 참가한 것임.
따라서, 홍범도 장군은 청산리 전투에서 같이 싸웠으나 무장해제를 거부하고 만주로 돌아간 김좌진, 이범석 장군 등과는 다른 길을 간 것임. 특히, 홍범도 장군의 빨치산 증명서에는 활동 기간이 1919∼1922년으로 기록되어 봉오동과 청산리전투에도 빨치산으로서 참가했다는 의혹도 있음.
그리고, 1922년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이 개최한 ‘극동민족혁명단체 대표대회’에 한인대표 52명의 일원으로 참석하였고, 동년 레닌으로부터 권총, 상금, 친필 서명된 ‘조선군대장’ 증명서를 접수하였으며, 1927년에는 소련공산당에 입당하는 등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임.
따라서, 홍범도 장군의 독립운동 업적은 업적대로 평가하되, 이후 소련공산당 활동에 동조한 사실들에 대해서는 달리 평가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봄. 더욱이, 북한의 김일성이 소련공산당의 사주를 받고 불법 남침하여 6·25전쟁을 자행한 엄연한 사실을 고려할 때 공산주의 이력이 있는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육사에 설치하여 기념하는 것은 육사의 정체성을 고려 시 적절하지 않음.
앞으로 육사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교내 기념물 재정비계획에 따라 자유민주주의와 대한민국 수호를 위한 장교 양성이라는 학교의 정체성에 맞게 최적화된 교육환경을 조성할 것임. 특히, 사관생도들이 독립운동의 역사를 포함하여 국난 극복의 역사 전체를 학습할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할 것임.
그러나, 아쉽게도 일각에서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문제를 이념전쟁과 친일행각으로 부추겨 정치 쟁점화시키고 있는 현 상황을 안타깝게 생각함. 이러한 정치적 쟁점과 무관하게 사관생도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육사에서 육사의 정체성에 부합하도록 생도교육을 위한 최선의 방안을 수립하고 추진할 것임.
국방부는 육사를 포함한 사관학교들이 독립운동과 6·25전쟁을 포함하여 순국선열과 호국영웅들을 추모하고 그분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계승하여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정예강군으로 육성하도록 최선을 다해 지원할 것임.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