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대 총선 비례대표 생환율 10%
지역구 터줏대감과 갈등, 연고지 급조
'유능한 비례대표 재공천' 대안 제시도
국회의원 선거는 '좁은 문'이다. 총선 때마다 당 안팎의 요구로 현역의원 절반 가까이 물갈이된다. 지역구 없이 여의도에 입성한 비례대표 의원에게는 더 가혹하다. 19대 국회(2012년) 이후 세 차례 총선에서 재선에 성공한 비율은 10% 안팎에 불과하다.
그래서일까. 21대 국회 비례 의원 47명 가운데 내년 22대 총선에서 출마를 노리는(23일 기준)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 의원 26명의 예상 지역구를 살펴봤더니 대다수인 22명(85%)이 소속 정당에 우호적인 곳을 점찍은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 또는 이재명 후보가 우위를 보인 지역들이다. 비례 의원들이 험지에서의 승부를 통해 정치적 명분과 입지를 갖추기보다는 당선 가능성이 높은 양지를 발 빠르게 찾아다니는 셈이다.
전문성을 발휘하라고 뽑아준 비례 의원의 경력을 발판 삼아 '꽃길'만 걸으며 혜택을 누리는 얌체 짓으로 비칠 수 있다. 하지만 당사자에게는 오로지 재선을 위한 '생환'이 절실한 과제다.
비례대표, 생환율 10%의 '좁은 문'
16대 국회(2000년) 이후 초선의원 비율은 40~60%에 달한다. 21대 국회도 2020년 개원 당시 기준으로 초선 비율은 50.3%였다. 이런 문턱은 비례 의원들에겐 더욱 높다. 20대 국회 비례대표 의원 47명 가운데 21대 국회에 재진입한 의원은 5명(송옥주 이재정 이태규 임이자 정춘숙 의원)으로, 생환율은 10.6%에 그쳤다. 20대 국회(9.3%)와 19대 국회(9.3%)도 비슷했다.
임기 내내 표밭을 관리할 수 있는 지역구 의원과 달리, 비례 의원들은 임기 도중이나 총선 직전에야 지역구를 확보하는 경우가 많다. 한 비례 의원은 23일 "지역구 의원은 광역·기초 의원, 지자체장을 장악하고 있어 조직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터를 닦아 온 현역 지역구 의원이나 원외 인사들과 출발점부터 다른 만큼 비례 의원이 공천을 받기 위한 1차 관문인 당내 경선을 통과하는 게 녹록지 않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갈등도 빈번하다. 국민의힘에선 수도권의 한 지역구에서 공천을 받으려는 비례 의원과 원외 지역인사 간에 갈등이 불거져 비리 의혹 폭로전으로 비화된 적도 있었다.
'안전한 지역구' 몰리는 비례 의원들
본보는 내년 4월 22대 총선에서 지역구 출마를 검토하는 국민의힘과 민주당의 비례 의원들의 출마 예정지를 살펴봤다. 영남과 호남처럼 여야 지지율이 극명히 갈리는 '텃밭'도 있지만, 그 외 지역에선 지난해 대선에서 해당 지역구의 정당별 득표수를 '우호적 지역구' 기준으로 삼았다.
국민의힘 비례 의원 22명 가운데 희망 지역구(검토 중인 곳 포함)를 밝힌 의원은 14명이다. 이들 중 78.6%(11명)는 지난해 대선에서 윤석열 당시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이겼던 지역에 도전하려는 것으로 집계됐다. 권은희(광주 광산을), 정운천(전북 전주을), 최영희(경기 의정부갑) 의원 등 3명만이 이재명 후보가 이겼던 험지 출마를 고려하고 있다.
민주당 비례 의원은 16명으로 이 가운데 12명이 현재까지 재선 의사를 밝혔다. 야권 강세가 뚜렷해 민주당 우세지역으로 분류되는 호남과 경기지역에 91.7%(11명)가 쏠려 있다. 이들과 달리 윤 대통령이 지난 대선에서 우세했던 지역의 출마를 준비하는 경우는 서울 마포갑을 저울질하는 신현영 의원 정도다.
비교적 당선 가능성이 높은 '안전한' 지역구에 깃발을 꽂으려다 보니 연고를 급조하는 사례도 있다. A 의원은 불과 수개월 전 해당 지역구로 이사를 갔는데도 지역 주민이라고 강조하며 다니는가 하면, B 의원은 수십 년 전에 군복무를 근처에서 했다는 점을 내세워 출마예정 지역구와의 인연을 부각하고 있다.
"꽃길만 찾는다" 비판도
이처럼 비례 의원들이 임기 동안 재선을 위한 지역구 찾기에 나서면서 비례대표제가 지역구 재선을 위한 징검다리로 활용된다는 지적이 무성하다. 직역의 전문성을 살리거나 소수자를 대변하는 비례대표 본연의 취지를 살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 정치권 인사는 "지역구 의원에 비해 공천에 불안이 큰 일부 비례 의원들은 공천권을 쥔 지도부 눈에 들기 위해 선명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상대 진영이나 당내 비주류에 대한 공격수 역할을 도맡는다"고 꼬집었다.
이미 '비례대표 공천' 자체가 혜택인데, 험지가 아닌 당선 가능성이 높은 지역구에 다시 출마하려는 건 과도한 특혜나 마찬가지다. 2020년 총선 낙선 이후 3년 넘게 지역구를 관리해온 한 원외 인사는 "시간과 돈을 들여 지역구 유권자를 만나서 우리 당에 유리한 여론 지형을 만들어 왔는데, 갑자기 비례 의원이 밀고 들어와서 과실을 가져가려 한다는 생각에 화가 난다"고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비례 공천 투명화한 뒤 비례대표 재공천 기회 열어 줘야"
다만 전문가들은 비례 의원들의 의정활동을 평가해 그에 따라 기회를 부여한다면 이 같은 기형적인 '출마 러시' 현상이 완화될 것으로 보고 있다. 비례대표제를 없앨 수는 없는 만큼 능력과 기여에 따라 재선에 대한 욕구의 숨통을 틔워야 한다는 것이다.
장승진 국민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한국 정당은 유독 비례 의원에게 비례대표 재공천을 잘 안 주기 때문에 비례 의원들이 의정 연속성을 위해 지역구를 찾아갈 수밖에 없는 여건"이라고 진단했다. 장 교수는 "당원투표 도입 등으로 비례대표 공천 과정의 투명성을 높인 뒤 의정활동이 우수한 비례 의원에 대해 비례대표 재공천을 허용한다면 유리한 지역구에 몰리는 현상이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이재묵 한국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도 "의정활동 성적 등 전반적으로 평가가 좋은 사람은 굳이 지역구를 찾지 않아도 비례대표로 재선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는 것이 대안"이라고 말했다.
'비례대표를 꼭 신인으로 채울 필요가 있느냐'는 주장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의정활동이 우수한 지역구 다선의원의 '마지막 기회'로 비례대표 공천을 주는 방안도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수도권 재선의원은 "비례대표를 끝으로 정계 은퇴를 하는 조건을 달아 공천을 준다면, 해당 의원은 다음 선거에 연연하지 않고 경험을 살려 소신껏 의정 활동을 할 수 있다"면서 "그 의원의 지역구는 정치 신인에게 돌아가니 일석이조"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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