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역사재단 '1947,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를 가다' 개막식
광복 후 미 군정 시기, 과도정부가 조선산악회(현재 한국산악회 전신)를 통해 울릉도와 독도를 조사한 문건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 혼란한 상황은 물론이고 한국전쟁 중에서도, 영토를 지키기 위해 헌신한 사람들의 노력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
동북아역사재단은 16일 서울 영등포구 독도체험관에서 열린 '1947,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를 가다' 기획전시 개막식에서 한국산악회의 도움을 받아 1947년 제1차 울릉도·독도 학술조사와 관련한 문서를 최초로 선보였다. 전시에서는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단 일행의 해상 수송 문건, 미 군정청의 출장 명령서, 과도정부 외무처 일본과에서 조선산악회장에게 보낸 편지 등 학술조사 경위와 그 과정에서 과도정부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역할을 밝혀주는 사료를 볼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76년 전, 조선산악회는 국토 구명 사업의 일환으로 과도정부( 미 군정기에 존재했던 정부)의 독도조사단과 함께 광복 후 최초로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를 실시했다. 또 그 성과를 국민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서울과 부산, 대구 등에서 '울릉도・독도 학술조사 보고전람회'를 개최했다. 정부는 1951년 태평양전쟁의 전후 처리를 위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되고, 1952년 발효되면서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 거세질 것으로 예상되자 한국전쟁 중인 1952년과 휴전 직후 1953년에도 2, 3차 학술조사를 실시했다. 미 공군 폭격대가 폭격연습을 위해 독도를 폭격하기도 했던 시기, 학술조사를 위해 험난한 여정을 자원한 것이다.
학술조사는 인문과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의학, 보도 분야 등으로 나뉘어 25~70여 명 규모로 진행됐다. 각 분야 권위자로 구성된 조사단은 전공 분야별로 울릉도와 독도의 지형지세와 동식물, 지질 등을 파악했고, 울릉도에서 무료 의료 활동을 벌였으며, 현지답사와 주민 인터뷰를 통해 역사, 고고, 민속, 방언 등을 조사했다. 사진과 영상을 찍어 기록으로 남기고, 독도에 한국령을 표시한 표목과 표석을 세우기도 했다.
이날 개막식에는 제3차 학술조사에 참가했던 한국산악회 김연덕(92)옹이 참석했다. 학술조사 당시 20대였지만 백발 성성한 노인이 된 김옹은 "그때 막내로 떠났는데 벌써 70년이 지나 나이가 92세하고도 4개월이 됐다"며 "이렇게 옛것을 귀중하게 생각하고 국민에게 알리게 해줘 감사하다"고 말했다.
재단 관계자는 "광복 후 혼란한 상황 속에서도 지속된 학술조사는 한국산악회의 꺾이지 않는 의지와 우리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이러한 민관 협력은 독도 수호에 대한 우리의 확고한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는 17일부터 볼 수 있으며 10월 31일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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