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넘게 자문중개업체 '전문가'로 활동
거액 자문료에, 국가핵심기술까지 유출
적발되자 가명 쓰고 신분증 위조하기도
檢 "청탁이나 이직 아닌 신종 유출 수법"
국내 1위 배터리업체 LG화학 2차전지사업부(현 LG에너지솔루션·LG엔솔)에 다니던 임원급 직원 정모(50)씨는 2019년 어느 날 솔깃한 광고 문구 하나를 발견했다. “다양한 산업 전문가의 컨설팅으로 고객사 전략 수립을 돕는다”는 자문중개업체 G사의 광고였다. 한창 주가가 오르던 2차전지 개발 업무를 소관하던 정씨는 곧 ‘전문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일부 고객이 정상적 자문이 아닌 영업비밀을 요구했다. 명백한 불법이었지만, 정씨는 마다하지 않았다. 자문료는 금세 시간당 100만 원을 돌파했고, 9억8,000만 원이 그의 통장에 쌓였다. 이렇게 2021년 5월부터 약 9개월간 320차례나 자문을 핑계로 유출된 영업기밀은 24건. 2차전지 연구개발 동향 및 로드맵, 생산라인 현황 등의 정보가 포함됐다. 정씨는 기밀 사항을 휴대폰으로 촬영해 뒀다가 고객 질문 내용에 따라 적재적소에 활용했다.
거침없는 답변에 고객들의 질문도 점점 대담해졌다. “자동차 업체 T사에 납품하는 배터리 관련 기술이 궁금하다”며 대놓고 기밀을 캐물었다. 심지어 정부가 지정한 국가핵심기술도 있었다. 해외 유출 시 산업기술보호법 위반 혐의로 3년 이상 징역형과 함께 최대 15억 원의 벌금형을 받을 수 있는 중범죄였다.
꼬리가 잡히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회사 측은 그를 의심해 G사에 “직원을 접촉하지 말라”고 공개 경고했다. 하지만 돈맛을 들인 정씨에겐 무용지물이었다. 그는 외려 가명을 3개나 돌려썼다. 자문료 입금을 위해 실명인증이 필요하다는 G사 측 요구에는 동생 주민등록증을 빌려 파워포인트(PPT)로 이름을 위조해 제출했다. 또 영업기밀을 흘려 얻은 자문료 5,300만 원 중 4,000만 원은 정씨가 따로 운영하는 회사 계좌로 차명 입금했다. 회사는 결국 지난해 10월 그를 해고했다.
검찰도 LG엔솔 측 고소로 올 초 강제수사에 착수했다. 정씨는 영업기밀을 불법취득한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누설하지는 않았다”고 발뺌했으나, 증거인멸 정황까지 포착돼 지난달 구속됐다.
서울중앙지검 정보기술범죄수사부(부장 이성범)는 14일 정씨를 산업기술보호법ㆍ부정경쟁방지법 위반, 공문서변조 및 범죄수익은닉규제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범행을 방조(부정경쟁방지법 위반)한 G사 이사 최모(34)씨는 불구속 기소했다. 검찰 관계자는 “경쟁업체 청탁이나 이직 과정에서 기밀을 빼돌리는 통상적 범죄 행태와는 다른 신종 수법”이라며 “수사를 확대해 유사 사례를 확인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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