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스플래틀리 군도에 고의 좌초
10명의 병사가 배 인근서 머물며 지켜
필리핀 상원의장 "중국 제품 불매해야"
남중국해를 둘러싼 필리핀과 중국 간 갈등이 연일 격화하고 있다. 지난 5일 중국 함정이 필리핀 보트를 물대포로 공격하면서 시작된 분쟁은 급기야 사건 발단이 된 ‘좌초 폐군함’의 이양 여부 문제로까지 번지고 있다. 장외에서 양국 간 진실 공방이 벌어진 가운데, 미국이 필리핀 편을 들며 가세하자 긴장은 더욱 고조되는 분위기다.
필리핀 대통령 "선박 이동 합의? 중국 상상일 뿐"
10일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은 이날 “우리 영토에서 우리 선박을 이동시켜야 한다는 어떤 합의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고 밝혔다. 이어 “모든 것은 중국의 상상일 뿐이고, 행여 그런 합의가 있더라도 당장 백지화하겠다”며 바짝 날을 세웠다.
마르코스 대통령이 언급한 ‘선박’은 24년 전 남중국해 스플래틀리(중국명 ‘난사’·필리핀명 ‘칼라얀’) 군도에 좌초된 폐군함 ‘시에라 마드레’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인 1944년 미국에서 건조된 이 배는 필리핀 해군의 정식 취역함이 됐다.
하지만 1999년 시에라 마드레는 ‘고의 좌초’ 방식으로 항해의 생을 마감했다. 중국이 1995년부터 스플래틀리 군도 인근 암초에 군사 시설을 짓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필리핀이 섬에서 40㎞ 떨어진 곳에 위치한 모래톱(shoal) 위에 이 배를 일부러 좌초시킨 것이다. 그리고 시멘트 등을 이용해 배를 고착한 뒤 군 병력이 지키도록 했다. ‘필리핀 영해’라며 맞불을 놓은 셈이다.
유령선 같아도... '필리핀 영해 주권 상징'
잔뜩 녹이 슬고 구멍도 곳곳에 뚫려 마치 유령선처럼 보이지만, 시에라 마드레는 필리핀 영해 주권 상징이다. 10명 안팎의 해병대원이 인근에 상주하면서 배를 지킨다. 닷새 전 시작된 중국과 필리핀의 분쟁도 이 배를 둘러싸고 촉발됐다. 중국 해경이 물대포를 발사한 필리핀 보트는 다름 아니라, 시에라 마드레를 지키는 병사들에게 전달할 보급품을 싣고 이동하던 선박이었다.
중국은 필리핀의 주권 침해 행위에 대한 정당한 대응이라는 입장이다. 전날에는 시에라 마드레를 콕 집어 “필리핀이 암초에 눌러앉은 군함을 옮기겠다고 여러 차례 약속했는데 아직 이행하지 않았다. 즉시 예인하라”고도 촉구했다. 다만 이 같은 주장의 근거는 중국이 남중국해에 일방적으로 그은 9개의 가상 해상경계선(남해구단선)이라는 점에서, 논란의 소지가 없진 않다.
미국 국방장관도 가세... 미중 갈등 번지나
마르코스 대통령의 이날 기자회견 발언은 좌초 군함을 이동시킬 뜻이 없다는 걸 분명히 한 것이다. 필리핀 국가안보회의(NSC)도 이날 “중국은 우리가 누구와 약속했는지 공개하고 문서를 가져오라”고 밝혔다. 관련 합의가 있었다는 중국 주장을 전면 부정한 것이다.
필리핀 내 반중 감정도 격화하고 있다. 후안 미구엘 주비리 필리핀 상원의장은 이날 “중국의 괴롭힘에 항의하는 표시로 모든 중국산 제품을 불매해야 한다”고 제안하기까지 했다.
이번 다툼은 이제 미중 갈등으로도 번질 조짐이다. 중국의 필리핀 보트 공격 사흘 후인 8일, 로이드 오스틴 미국 국방장관은 길베르토 테오도로 필리핀 국방장관과의 전화 통화에서 양국 간 동맹 협력을 재확인했다. 이에 중국 관영 글로벌타임스는 10일 전문가들 의견을 인용해 “미국의 선동과 개입이 증가하고 있다”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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