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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긋난 관계 틈으로 발하는 소중한 빛을 찾는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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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긋난 관계 틈으로 발하는 소중한 빛을 찾는 이야기들

입력
2023.08.04 04:30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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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 세 번째 소설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내밀한 관계 속 복잡한 감정 읽어 낸 중단편 7편
시간이 흐른 후 발견하는 '희미한 빛'의 울림들
여성 등 사회·구조적 문제와 매끈하게 연결해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다희와 주고받던 이야기들 속에서만 제 모습을 드러내던 마음이 있었으니까. 아무리 누추한 마음이라 하더라도 서로를 마주볼 때면 더는 누추한 채로만 남지 않았으니까. 그때, 둘의 이야기들은 서로를 비췄다. 다희에게도 그 시간이 조금이나마 빛이 되어주었기를 그녀는 잠잠히 바랐다." ('일 년'에서)

서로의 마음을 더는 누추하지 않게 비출 수 있는 관계는 얼마나 귀한가. 그럼에도 끊어질 수밖에 없는 관계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관계 속 내밀한 감정을 세심하게 포착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보여준 최은영(39)이 소설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로 돌아왔다. '쇼코의 미소'(2016), '내게 무해한 사람'(2018)에 이어 세 번째 소설집이다. 어긋나고 틀어진 사람 사이를 보다 깊숙이 들여다 봄으로써 찾아낸 희미한 빛을 세밀한 언어로 옮긴 중·단편 7편을 실었다. 결코 평탄하지 않은 그 여정을 진솔하게 그린 이야기들이 독자를 다독인다. 서툰 관계에 홀로 낙담해 눈감아버리지 않도록.

수록작들이 조명하고 있는 관계는 크게 두 유형이다. 나와 내가 동경하던 인물, 나와 나를 보살펴 준 인물. 표제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와 '몫' '일 년'이 전자라면, '답신' '파종' '이모에게'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은 후자에 속한다.

올해로 데뷔 10주년을 맞은 최은영 작가는 소설집 '쇼코의 미소' '내게 무해한 사람', 장편소설 '밝은 밤', 짧은 소설 '애쓰지 않아도'를 통해 허균문학작가상, 김준성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대산문학상, 젊은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올해로 데뷔 10주년을 맞은 최은영 작가는 소설집 '쇼코의 미소' '내게 무해한 사람', 장편소설 '밝은 밤', 짧은 소설 '애쓰지 않아도'를 통해 허균문학작가상, 김준성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대산문학상, 젊은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표제작의 화자는 다니던 은행을 그만두고 스물일곱에 대학 영문학과 편입생이 된 '희원'이다. 그는 지적인 자극을 주는 젊은 강사인 '그녀'에게 매료된다. 희원은 "독자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는 듯"한 그녀의 에세이를 읽고 날것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적어낸 그 용기가 부러웠다. 자신은 언제나 '안전한 글쓰기'를 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소소한 일들로 가까워지던 어느 날, 대학원 진학을 희망하는 희원은 "공부는 대학원 아닌 곳에서도 할 수 있는 거, 희원씨도 알죠"라고 되묻는 그녀로부터 상처를 받는다. 그리곤 되갚기라도 하듯이 정교수가 아닌 강사라는 불안정한 지위를 인식하게 하는 말들로 그녀의 약한 곳을 찌른다. 그렇게 둘의 관계는 파탄 난다.

그녀를 다시 생각한 건 9년이란 시간이 흘러서다. 희원도 그녀처럼 젊은 강사가 되었다. 이제는 안다. 그녀의 조언이 자신을 무시해서가 아니란 걸. 오히려 그때의 자신이 가졌던 열등감, 피해의식을 읽는다. "막연하게나마 그녀를 따라가고 싶었던" 시절, 막막한 미래에 등불을 들고 이끌어 줄 빛을 그녀에게서 찾아보려 했지만, 그 빛을 본 건 시간이 흐른 뒤였다. 작가는 그 과정에서 회피하고 싶었던 희원의 은밀한 감정들을 꾹꾹 눌러 써내려 간다. 마치 인물의 성장을 위한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그 의식의 목적은 관계를 다시 잇는 게 아니라 내면을 돌아본 인물이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게 디딤돌 하나를 놓아주는 데 있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최은영 지음·문학동네 발행·352쪽·1만6,800원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최은영 지음·문학동네 발행·352쪽·1만6,800원

최은영 소설의 무게감은, 작가가 관계의 균열을 사회적 맥락에서 헤아린다는 점에서 비롯한다. 이번 작품에서도 작가는 "현실의 문제를 다루는 일에 '여전히' 용감"(양경언 문학평론가)하다. 대부분 수록작의 근간에는 여성 폭력의 문제가 있다.

수록작 '몫'에서는 미군에게 살해당한 기지촌 여성 5주기 추모집회를 취재한 대학 교지편집부 기자인 '해진'과 '희영'이 분노하는 내용이 나온다. 둘은 살해당한 여성의 시신 사진을 그대로 유인물에 싣고 반미 구호에만 초점을 맞추는 집회에 절망한다. 이는 평소 동경하던 선배 '정윤'과의 관계가 틀어지는 데도 결정적 계기가 된다. 정윤이 편집회의에서 이 주제를 여성 문제 '정도로' 축소하듯 발언하면서다. 급기야 희영은 주한미군이 철수하고 통일 조국이 되면 여자들이 맞고, 강간당하고, 죽임당하는 일이 없어지느냐며 울분에 찬 질문을 던진다.

또 다른 수록작 '답신'과 '이모에게'에는 가정폭력과 가부장제도의 문제를 녹여냈다. 작가의 시선은 비정규직 문제('일 년'), 2009년 용산참사 사건('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등으로도 향한다. 그렇게 최은영의 소설은 여러 이유로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 속에서 "자신이 느껴야 했던 마음을 영원히 유예"하려고 했던 이들을 깨운다. 깨진 관계의 틈에서도 발하는 빛을 눈앞에 그려주고 그 마음을 들여다봐도 된다고 속삭이면서.

진달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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