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 6개월 만에 대출제도 개편
담보 범위 넓히고, 비은행도 지원
'은행의 은행' 한국은행이 11년 6개월 만에 대출제도를 개편한다. 대출 문턱을 낮추고 비은행기관까지 지원 대상을 넓혀 '유동성 안전판' 역할을 강화하겠다는 내용이 골자다.
한은 금융통화위원회(금통위)는 27일 자금조정대출 등 대출제도 개편을 의결했다고 밝혔다. 자금조정대출은 대규모 예금 인출(뱅크런)처럼 급격한 유동성 위기가 왔을 때 은행이 수시로 한은으로부터 돈을 빌릴 수 있는 제도다. 그러나 '부실 은행'이란 낙인 효과를 우려해 이용 은행이 많지 않았다고 한다. 글로벌 은행 위기를 몰고 왔던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때 대규모 예금이 모바일기기를 통해 삽시간에 빠져나가는 현상을 경험한 뒤, 유동성을 신속하게 지원할 수 있는 자금조정대출 활용도를 높일 방안을 고민해 왔다는 게 한은 설명이다.
이번 개편은 2012년 2월 이후 처음인데, 한은이 특히 강조한 것은 대출담보 확대다. 대출 시 국채, 통안증권 외에도 은행채, 9개 공공기관 발행채, 기타 공공기관 발행채, 지방채, 우량 회사채도 맡길 수 있게 됐다. 담보 범위 확대는 한은의 다른 대출제도에도 적용된다. 한은은 향후 은행 자산의 70~80%를 차지하는 대출채권도 담보 범위에 넣겠다는 계획이다. 다만 한국은행법 개정 또는 유권해석이 선행돼야 해 1년 정도 법적·실무적 검토가 필요하다. 홍경식 통화정책국장은 "SVB 사태를 계기로 주요국 실태를 조사했는데 미국, 유럽, 일본, 영국 모두 대출채권까지 담보로 받고 있다"고 부연했다.
금통위가 새마을금고, 신협, 수협 등 관리 범위 밖의 비은행 기관에도 유사시 유동성을 지원하기로 합의한 것도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홍 국장은 "시중은행이 비은행 기관에 유동성을 지원했는데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 경우 '영리기관에 대한 여신 규정'인 한은법 80조에 근거해 중앙회에 대출해 주겠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부실 기관에 대한 지원이 아니라, 위기감이 전염돼 건전한 기관까지 쓰러지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라는 점도 분명히 했다.
비은행 기관의 시장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는 점에서 홍 국장은 "장기적으로는 미국처럼 한은도 비은행 기관을 규제·감독하고 일반 대출도 가능하도록 제도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는 생각도 밝혔다. 그러면서 이번 개편은 기관들 간 '밥그릇 싸움(권한 다툼)'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는 "정부·당국도 필요성을 공유하고 있고, 필요한 정보는 전적으로 제공하겠다고 밝혔다"고 전했다.
한은은 이번 조치로 은행에 90조 원 규모의 추가 유동성을, 비은행엔 100조 원 유동성을 지원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개편 내용은 31일부터 시행된다. 전산 구축 문제로 지방채, 기타 공공기관 발행채, 우량 회사채는 다음 달 31일부터 담보에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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