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관람객에 질문 유도, 의미는 관객이 만드는 것
②‘숨은그림찾기’로 고정관념에 의문 제기
③‘원전성’ 없다고 ‘차용’의 가치 폄훼하지 말라
회색 바탕 위 세로로 이어진 검은 선이 오른쪽으로 휘어진 그림이 있다. 오른편에 걸린 그림에서는 이 검은 선이 이내 아래로 꺾여 세로로 이어진다. 의미를 단정할 수 없는 추상화다. 하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바닷가의 도로를 떠올릴 수 있다. 검은 선과 회색 바탕 구도의 원근감이 그 근거다. 멀리 보이는 푸른색은 하늘, 검푸른 구릉 형태는 산, 흰 바탕은 바다를 떠올리게 한다. 구상화로도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비슷하지만 다른 두 그림이 짝을 이루고 있는 점도 이채롭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 갤러리바톤에서 지난 12일부터 열리고 있는 전시 '브릴리언트 컷'(Brilliant Cut)에 나온 영국 설치미술가 리암 길릭(Liam Gillick)의 회화 ‘LOOP 1/2’ 얘기다.
'브릴리언트 컷'에서는 길릭 외에도 정희승·쿤 반 덴 브룩(Koen van den Broek)·앤드루 심(Andrew Sim)·토니 스웨인(Tony Swain)·미츠코 미와(Mitsuko Miwa)·샤를로프 포세넨스케(Charlotte Posenenske)·최지목 등 동서양 작가 8명의 회화, 설치미술, 사진작 등 13점을 전시하고 있다.
이번 전시작 다수는 비슷하지만 다른, '쌍둥이'와 같은 이미지를 이어 붙여놨거나 한 회화 안에서 유사한 이미지를 나열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굳이 같은 이미지를 변주해 병렬한 이유가 뭘까.
이런 질문을 품게 만드는 것 자체가 작가의 의도라고 볼 수 있다. 길릭은 예술품이 창작물과 관람객 사이에 교환되는 정보로 완성된다고 보는 ‘관계 미학’(Relational Aesthetic)의 정립에 기여한 작가다. 그의 작품 해석은 창작자의 의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관객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관계 미학은 회화나 설치미술의 독립적 의미보다는 관객의 존재로 인한 사회적 관계와 대화에 중점을 둔다.
이미지의 실체에 품게 되는 의문들
이 같은 시도는 이미지에 대한 고정관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시도이기도 하다. 이는 이번 전시회에 나온 일본 태생 작가 미츠코 미와의 회화 ‘Las Vegas’에서도 드러난다. 설산을 배경으로 한 두 개의 집과 그림자 풍경 그림을 나란히 그려 붙인 것이다. 이 같은 그림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숨은그림찾기처럼 다른 점을 찾으며 그 이미지의 실체란 무엇인가 의문을 품게 된다. 회화가 미적 관조의 대상이 아닌 생각할 거리와 영감을 주는 매개체로 기능하고 있는 셈이다. 작품의 의미를 완성하는 것은 관객이며 창작자는 조력자 역할에 그친다.
이들 작품은 ‘원전성’(Originality)이 없는 ‘차용‘(appropriation)이라고 해서 그 가치를 폄훼할 수는 없다는 점을 보여주려는 의미도 품고 있다. ‘원전성’과 ‘차용’ 사이에 단정할 수 없는 회색지대가 존재하며 그 가치가 무시돼서는 안 된다는 게 이번 전시의 주제의식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전시명 '브릴리언트 컷'의 의미는 상징적이다. 이는 다이아몬드 연마 방식을 말하는데 어떤 각도에서 보이든 비슷하게 보이며 시작점과 끝점의 구별이 무의미하다. 원전성과 차용성 사이에 대한 복잡한 질문을 함축하고 있다.
한 회화에 비슷한 이미지… "'원전'과 '차용'은 적대 관계 아냐"
이 같은 주제의식을 아예 한 개의 회화에 담은 전시작도 있다. 영국 교포 작가 앤드루 심의 회화 ‘TWO MONKEY PUZZLES WITH SPRING GROWTH’는 비슷하지만 다른 삼나무 두 개를 하나의 캔버스에 그려 넣었다. 자세히 살펴보면 두 삼나무의 한 잎은 서로 맞대고 있다. 예술에서 원전과 차용은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라 동료처럼 친숙한 관계란 주장을 자연을 소재로 나타낸 것으로 풀이된다.
사실 ‘컨템포러리아트’(동시대 예술)에서 비슷하지만 다른 이미지의 나열을 통해 이와 비슷한 주제의식을 나타낸 작품은 이전부터 있어왔다. 앤디 워홀이 실크 스크린 기법으로 여러 다른 색을 가진 마릴린 먼로를 남긴 것이 대표적이다. 이번 전시작들은 비슷하지만 형태가 다른 이미지인데다 그 속에 ‘시간성’을 담아 차별성이 있다.
변신하는 복사기에 담긴 '시간성'… 인식의 새로운 경험
정희승 작가의 사진 ‘복사기_A, B, C, D, E’(COPIER_A, B, C, D, E)는 이를 잘 보여준다. 같은 사물이지만 이용자의 필요에 따라 변화하며 각기 다른 이미지를 나타내는 복사기의 모습을 포착한 5장의 사진을 나열한 작품이다. 규칙성 있는 이미지의 변화가 시간의 흐름을 인지하게 한다.
이같이 이미지에 시간성을 부여했을 때 나타나는 효과는 뭘까. 대상의 의미를 관람객이 각기 다르게 정의하는, 인식의 새로운 경험을 유도하는 게 작가의 의도다. 다른 작품들처럼 관람객 스스로 작품의 의미를 부여하면서 인식의 지평을 넓혀가는 경험을 제공한다는 취지다.
이같이 주제의식이 유사한 동서양 작가 8명의 작품 대부분은 전시 기획자의 요구에 맞춰 제작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이채롭다. 갤러리 측은 "이번 전시작 대부분은 이미 존재했던 것”이라며 각자 창작활동을 하는 동서양 작가의 작품 가운데 전시 주제에 맞는 것을 가려 모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미술전문가도 아닌 일반 관람객이 이같은 의미에 지나치게 집중할 필요는 없다. 편안한 마음으로 '멍 때리기'에도 좋은 소재이기 때문이다. 이미지의 기하학적 균형 자체를 즐기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아일랜드 태생 영국 작가 토니 스웨인의 ‘THE LAST LOOKALIKE’도 그같은 관람의 즐거움을 주는 작품이다. 그는 신문지를 찢어 붙이는 '콜라주(Collageㆍ여러 요소를 한데 오려 붙이는 예술기법)'에 회화를 더해 작품을 완성했다. 구상으로 보면 한적한 휴양지 내지는 전원마을을 표현한 것으로 보이지만, 추상으로 보면 보는 이에 따라 각기 다른 의미를 지닌다.
임미경 갤러리바톤 큐레이터는 “이번 전시작들은 마치 두 개의 카드가 서로를 지탱하듯 서 있는 엄밀한 기하학적 균형과 역학 구도 안에 잠재되어 있는 팽팽한 긴장감을 동시에 선사한다”며 “작가들도 예술적 해석을 관람객에게 맡기는 작품이기 때문에 회화, 조각, 사진 등 여러 매체와 각기 다른 표현방식에 나타난 이미지의 중첩 자체를 즐길 수도 있다”고 말했다. 전시회는 8월 12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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