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무형문화재 '낙화장' 김영조씨
“천연 재질 타며 깊이 있고 자연스러운 색감”
“삼각 인두로 정교한 표현, 한국 낙화 독자성”
“규방서 시작, 서민의 미… 후학 거의 없어”
“사물을 어느 정도 태우느냐에 따라 색이 달라져 질감의 차이가 섬세하게 표현됩니다. 먹으로 농담을 살려 수없이 많은 색을 만들어내는 묵화와 같은 멋이 있습니다."
숯불에 달군 인두로 종이, 나무, 가죽 등의 표면을 지져서 그림, 문양 등을 표현하는 한국 전통공예가 낙화(烙畫)다. 국내 유일의 '낙화장(烙畵匠)' 국가무형문화재(제136호) 김영조(71)씨는 최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50여 년을 매달린 낙화의 매력을 강조했다. 조선시대 규방에서 시작해 400여 년 역사를 지닌 전통 낙화 특유의 서민적 아름다움을 알리고 싶다는 것.
김씨가 낙화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72년쯤. “당시 한국일보 지면에 ‘낙화 수강생 모집’ 광고를 보고 삼일고가로 인근 한 빌딩에 있던 전창진씨의 낙화연구소를 찾아갔다”고 그는 회고했다. 천연 재질이 타면서 만들어지는 아름다운 색과 예술성에 자연스럽게 빠져들었다. 당시 전씨의 교실에는 국내 유수의 미대 재학생 등 30여 명이 낙화를 배우려고 모였다고 한다. 하지만 전씨 곁을 끝까지 지킨 이는 고교 졸업 후 미대에 진학할 형편이 되지 않았던 그뿐이었다. “조그만 방 안에 숯불 수십 개를 피우면 한여름엔 체감온도가 섭씨 50, 60도까지 올라갑니다. 저는 그것도 견딜 수 있을 만큼 낙화가 좋았어요.”
"낙화 교실 문 닫자 독학으로 연마... 순수예술 가치 커"
결국 낙화연구소마저 문을 닫자, 김씨는 수년간 독학으로 낙화를 연마했다. 1979년 충북 보은군 속리산에 낙화전문점을 차린 그의 작품은 관광기념품으로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나무판에 정이품송을 새긴 작품이 특히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그는 낙화를 하면 할수록, 순수예술로서의 가치를 크게 느꼈다고 한다. “동양화 대작을 옮기면서 낙화가 표현력 등에서 훌륭한 예술이란 것을 깨달았어요.”
그는 1998년 낙화전문점을 접고 작품 활동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2000년 보은군에 낙화 작업실, 연구실, 전시실을 차린 그의 손에서 정교한 대작들이 쏟아져 나왔다. 마침내 2007년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에서 특선을 차지했고, 2010년 충북무형문화재(제22호)로 지정됐다. 2018년엔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에 이른다.
"단순 도구로 쉽게 이해 가능한 예술, 한지와 잘 어울려"
김씨는 세계미술시장에서도 낙화의 경쟁력이 있다고 밝혔다. “단순한 도구로 누구나 원초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예술이기 때문”이라는 것. 2014년 이탈리아 아솔리 비엔날레에서 외국인들 대상으로 낙화 시연을 할 때 이를 실감했다. “처음엔 동양인이 작은 도구로 공예를 하니 몇몇이 대수롭지 않게 쳐다보다가, 30분도 안 돼 수백 명이 모여들어 박수 치고 환호하며, 작품을 사겠다고 줄을 섰습니다.”
김씨는 한국 전통 낙화의 독창성에 자부심이 컸다. 그는 “중국 낙화는 인두가 넓적하지만, 한국 낙화의 인두는 삼각형이어서 더 세밀한 표현이 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낙화를 한지에 그렸을 때 가장 순수하고 편안한 색이 나온다”며 “언뜻 생각하면 한지가 타버릴 것 같지만 약한 열을 이용하면 아름다운 색이 나온다”고 했다.
그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전통 낙화의 명맥을 이을 후학이 거의 없다는 것. 현재 그에게 낙화를 전수받는 이는 딸 유진(41)씨뿐이다. 김씨는 “세계에 자랑할 만한 우리 미술 공예는 민화, 청자 등 몇 개 안 되는데 낙화를 사장시키면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제약사 한독은 지난 6월 'MZ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 15명을 김씨가 운영하는 보은전통공예체험학교로 초청해 낙화 체험 행사를 열었다. 한독은 2000년부터 무형문화재를 대상으로 건강검진을 제공하는 사회공헌 사업을 하며 김씨와 인연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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