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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상무에서 학원 직원으로, 여성 임원의 적나라한 '퇴직 일기'

입력
2023.07.07 04:30
수정
2023.07.07 06:58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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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아 前 신세계그룹 상무
퇴직 이후의 삶 담은 '어느 대기업 임원의 퇴직 일기'
"퇴직 후 미래 상상하는 기회 되기를"

직장을 수십 년간 다닌 회사원이라면 퇴직 순간과 이후의 삶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특히 여성 직장인의 퇴직 후 삶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게티이미지뱅크

직장을 수십 년간 다닌 회사원이라면 퇴직 순간과 이후의 삶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특히 여성 직장인의 퇴직 후 삶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게티이미지뱅크

“여기 계신 분들은 올해가 마지막인 분들입니다.”

2018년 신세계그룹의 승진 인사에서 유일한 여성 임원으로 낙점돼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정경아 상무. 이후에는 날개 없이 추락했다. 실적 부진을 이유로 1년 만에 한직으로 밀려났고, 다시 1년 만에 퇴직통보를 받았다. “그동안 애쓰셨습니다.” 회사 대표의 한마디와 악수로 모든 게 끝났다. “30년 직장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다. 30년 세월에 종지부를 찍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3초에 지나지 않았다.”

인생의 최정점에서 강제 퇴장당한 정경아(54) 전 상무가 책 ‘어느 대기업 임원의 퇴직 일기’를 출판한 것은 그래서 필연이다. 퇴직 당시 느낀 혼란, 일을 잃고 나서의 공허함, 다시 일어서기까지의 회복 과정을 꾹꾹 눌러썼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퇴직 이후의 삶을 상상하고 계획하도록 알려주는 인생의 지침서 같은 책. 그는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회사에서 성공하고 인정받으면 회사 밖에서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달랐다”며 “나와 같은 과정을 밟는 이들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책을 썼다"고 했다.

정경아 지음ㆍRHK 발행ㆍ247쪽ㆍ1만7,000원

정경아 지음ㆍRHK 발행ㆍ247쪽ㆍ1만7,000원

20년 전 경력 사원으로 회사에 입사했다. 어떻게든 인정받고 싶었다. 야근을 도맡아 했고, 자비를 들여 이웃 나라에 시장 조사를 갔으며, 아무도 자진해서 가지 않는 지점 근무를 지원했다. 모두가 기피하는 적자지점을 기어코 흑자로 전환시켰다. 성과를 거둘 때마다 ‘억척스럽다’는 비아냥거림을 받았지만 노력을 알아주는 회사에 감사했다. 직장에서의 성공을 인생에서의 성공이라 여겼다.

그런데 퇴직이라니. “회사가 이제 그만하라고 한다. 너 아니어도 된다고 한다. 나에게 소명의 기회를 주지 않고 성과 없음을 이유로 단칼에 무능력한 사람으로 찍어 벌을 준다니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어떻게 이 자리까지 왔는데, 내쳐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올라가면 언젠가는 내려와야 한다는 사실을 잊었다. 주차장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퇴직 후 삶은 도미노처럼 줄줄이 쓰러졌다. 당장 회사와 은행 간 제휴로 가입한 마이너스 통장 연장이 거절됐다. 대출, 연금, 보험, 건강검진 등 생활 전반에서 문제가 생겼다. 그는 “가볍게 떠나는 주말여행도 사전 조사를 하고 갖가지 계획을 세우건만, 은퇴 후 수십 년간 이어질 인생 여정은 전혀 준비를 못했다”고 했다.

‘대기업 여성 임원’ 타이틀을 탐내는 이들은 가끔 있었다. 퇴직 후 헤드헌터 업체에서 연락이 왔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클라이언트에 섭외력을 보여주기 위한 들러리에 불과했다. 스타트업 기업에 오픈 멤버로 참여해 월급도 받지 않고 일했건만 경영이 어려워지자 순식간에 해고됐다. “직장인, 특히 큰 기업에서 일했던 이력이 있을수록 퇴직 후 회사를 떠나면 누군가를 위한 소모품이 되기 쉽다. 안타깝게도 그들이 원하는 것은 퇴직자가 가진 역량이 아니라 껍데기일 가능성이 크다.”

어느 대기업 임원의 퇴직 일기를 쓴 정경아 전 상무. 그는 "남성들의 퇴직 후 이야기는 어느 정도 알려졌는데 여성, 특히 여성 임원은 숫자 자체가 적기도 해서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했다. 정경아 전 상무 제공

어느 대기업 임원의 퇴직 일기를 쓴 정경아 전 상무. 그는 "남성들의 퇴직 후 이야기는 어느 정도 알려졌는데 여성, 특히 여성 임원은 숫자 자체가 적기도 해서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했다. 정경아 전 상무 제공

2021년 강남의 한 면접 전문 학원에 자리를 잡았다. 학원으로 걸려오는 문의전화를 받고 상담예약을 잡아 고객에 커리큘럼을 안내하는 일, 청소와 비품관리, 블로그 작성 등의 일, 말 그대로 ‘상담 직원’이었다. 시급은 최저임금, 점심은 김밥 한 줄. 정 전 상무는 “제가 속했던 유통 산업은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넘어가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설거지와 서빙밖에 없더라”라고 했다.

구원을 얻은 곳은 일이 아니라 봉사에서였다. 구청에서 주관하는 교육사업 멘토 프로그램에 지원해 취약계층 청소년을 교육했다. 처음엔 쭈뼛했던 아이가 점차 마음을 열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위로와 뿌듯함을 느꼈다. 정 전 상무도 덩달아 힘을 얻었다. 실업자의 재취업을 위한 직업훈련을 지원하는 내일배움카드를 신청해 평소 관심 있던 과정을 들었다. 한 대학 평생교육대학원에서 직장생활 노하우를 강의하고, 글쓰기 플랫폼 브런치에 퇴직 이후의 삶을 연재하며 책도 출간했다.

그는 “명색이 대기업 임원이었는데 이미지 생각은 안 하냐”는 연락을 받았지만 “더 열심히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막연히 상상하던 퇴직 후 삶의 실상을 알고 깨달음을 얻는다면 오히려 영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지금은 ‘퇴직 전문가’를 목표로 유튜브 채널 운영, 직장인 대상 강의 등에 나선다.

그가 회사 생활을 영혼 없이 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직장에서 갖춘 성실한 삶의 태도, 성공의 경험은 사회에서도 자산이 될 수 있다. 다만 임원이 될 가능성은 단 1%, 나머지 99%의 직장인은 퇴직 후 미래에 눈을 돌려야 한다. “회사를 떠난 후에 회사에서의 시간만큼 더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꼭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언젠가 반드시 맞게 될 회사 밖 삶을 준비하는 일이야말로 프로직장인을 넘어 프로인생러가 되기 위한 필수 과제 아닐까요.”

정지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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