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 합병비율·손해 산출근거 등 분석 주력
불복 절차 추가 비용 소요와 실익 신중 검토
'국정농단' 박근혜·이재용 등 구상권 주장도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엘리엇)에 690억 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분쟁해결절차(ISDS) 판정을 두고 정부의 고심이 깊어지고 있다. 배상금에 지연이자와 법률비용까지 더해 1,300억 원 이상의 혈세가 해외 펀드로 고스란히 지불돼야 하는 상황. 불복 절차를 밟거나, 배상 판정에 원인을 제공한 이들에게 구상권을 청구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가운데, 법무부는 실익 분석이 우선이라며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22일 법조계에 따르면, 소송 주체인 법무부는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 중재판정부의 배상 판정 이후 이틀이 지나도록 판정문 분석에 집중하며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지난해 8월 31일 2,800억 원가량의 배상 판정이 내려진 론스타 사건의 경우,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선고 당일 "취소 신청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밝힌 것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법무부 주변에선 배상금 산정 근거 분석에 따른 정부 입장 공표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엘리엇 사건은 ①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 정부 부당 개입 여부 ②삼성물산 주주였던 엘리엇의 손해 여부 및 인과관계가 핵심 쟁점이었다. 정부의 부당 개입 여부는 '국정농단' 사건에 대한 법원 유죄 판결이 나와 있어, 중재판정부가 이를 인정할 것이란 전망이 우세했다. 결국 엘리엇이 정부 개입으로 손해를 봤는지, 손해가 발생했다면 어떻게 계산할 것인지에 관심이 쏠렸다.
엘리엇의 손실 여부가 뚜렷하지 않다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사건 당시 지분 7.12%를 갖고 있던 엘리엇은 2015년 합병 비율(삼성물산 1주당 제일모직 0.35주)이 부당하다며 반대했고, 주가가 하락하자 이듬해 삼성물산과 주식매수청구권 가격을 합의해 지분을 처분했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엘리엇이 당시 손해를 봤는지, 모든 정보를 공개해 판정한 것인지부터 살펴야 한다"고 말했다.
판정 결과에 대한 엘리엇 측 반응도 정부의 고민을 키우고 있다. 엘리엇은 "지난 정권 정부 관료와 재벌 간 유착관계로 주주들이 손실을 입은 사실이 재차 확인됐다"며 이번 판정이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법무부 장관의 특검 수사 결과라는 점을 강조했다. 실제로 론스타 분쟁 당시에도 국내 법원 판결이 판정에 주요한 역할을 했다. 다만 검찰 수사와 국내 판결이 론스타 측 과오를 입증하는 역할을 한 것과 달리, 이번 엘리엇 사태에선 정부 책임을 인정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판정문에 나오는 책임 주체에게 구상권 청구를 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석병훈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배상금을 얼마나 회수할지 모르겠지만, 구상권을 행사해 세금 손실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 홍완선 전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장 등이 구상권 청구 대상이 될 수 있다. 일각에선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승계를 위해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압박한 것이기에 삼성 총수일가에게도 변제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엘리엇 입장에선 국정농단 사건으로 '꽃놀이패'를 쥐게 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박상인 교수는 "정상적인 합병 비율을 얼마로 판단했는지, 엘리엇의 주식매수청구권 행사를 감안한 손해액 산출 근거가 합당한지에 따라 정부의 대응 방향이 정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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