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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년 된 고택이 무대로… 배우·관객이 함께 만드는 '환상의 밤'

입력
2023.06.16 10:00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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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선교장에서 펼쳐진 이머시브 공연 '월하가요'

편집자주

공연 칼럼니스트인 박병성이 한국일보 객원기자로 뮤지컬 등 공연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격주로 연재합니다.

강원 강릉 명소인 선교장에서 펼쳐진 이머시브 뮤지컬 '월하가요'. 엠비제트컴퍼니 제공

강원 강릉 명소인 선교장에서 펼쳐진 이머시브 뮤지컬 '월하가요'. 엠비제트컴퍼니 제공

최근 조선의 대표적 궁궐인 경복궁에서 이탈리아 브랜드 구찌의 패션쇼가 열렸다. 고풍스러운 궁궐 복도가 런웨이가 됐고 브랜드의 새로운 의상을 걸친 모델들과 이를 보러 온 명사들로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경복궁의 격조 높고 고풍스러운 아름다움과 구찌의 세련되고 현대적인 의상이 조화를 이루며 쇼는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문화유적지가 공연 콘텐츠와 결합하면서 관광지로서뿐 아니라 새롭고 현대적인 공간으로서 주목받는 사례가 늘고 있다. 베로나 오페라 축제는 2,000년이 넘은 고대 로마시대 원형 경기장인 '아레나 디 베로나'에서 펼쳐지는 세계 유명 오페라 축제다. 2만 명 넘게 수용할 수 있는 고대 유적지에서 만나는 오페라 공연은 유적이 주는 오라(aura)가 더해져 다른 오페라 축제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동을 준다.

국내에서도 최근 세종대왕 일대기를 다룬 뮤지컬 '세종, 1446'이 경복궁 근정전을 무대로 펼쳐지는 등 궁궐과 고택 등 문화 유적지의 공간적 특성을 활용한 공연이 이뤄지고 있다. 지금까지는 주로 국악이나 클래식 콘서트처럼 음악 중심의 공연이 주를 이뤘는데, 지난 8~14일 강원 강릉 선교장을 무대로 펼쳐진 '월하가요'는 선교장의 공간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현대적 극 형식으로 선보인 관객 참여 이동형 이머시브 공연이다.

선교장은 순조 때 지은 한국의 대표적인 고택이다. 사랑채인 열화당을 비롯한 네 채의 가택으로 구성돼 있다. 한옥의 아름다움이 잘 보존돼 있고 사시사철 자연과 어우러진 고택의 풍경이 일품이어서 강릉의 주요 관광 명소다.

강원 강릉 명소인 선교장에서 펼쳐진 이머시브 뮤지컬 '월하가요'. 엠비제트컴퍼니 제공

강원 강릉 명소인 선교장에서 펼쳐진 이머시브 뮤지컬 '월하가요'. 엠비제트컴퍼니 제공

'월하가요'는 선교장을 선계의 옥황상제와 하계의 인간 세상이 만나는 중간계로 삼고 희로애락(喜怒哀樂)을 상징하는 플레저(Pleasure), 퓨리(Fury), 새드(Sad), 펀(Fun) 네 가문의 갈등과 화해를 그렸다. 각 가문은 고유한 색깔이 있는데 관객들은 입장하면서 임의로 나눠 준 팔찌로 해당 가문의 결혼식 하객이 된다.

반딧불이 두고 간 마법의 커피를 마신 신랑, 신부는 결혼 상대가 아닌 다른 인물에게 반하게 된다. 퓨리 가문의 아들은 원수 가문인 플레저 가문의 딸과, 새드 가문의 딸은 원수 가문인 펀 가문의 아들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원수 집안의 자녀들이 사랑에 빠지고 마법의 물약으로 사랑이 엇갈리는 이야기는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한여름 밤의 꿈'의 익숙한 플롯을 따르고 있다. 익숙한 플롯이 주는 편안함과 재미 그리고 관객들이 공간을 이동하며 적극적으로 극에 참여할 수 있는 여지를 주면서 '월하가요'만의 매력이 더해진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가택 입구 너른 공간에서 엇갈리는 사랑을 목격한 후 관객들은 각자가 속한 네 가문의 가택으로 흩어지게 된다. 필자는 퓨리 가문이었는데 그곳에서는 가문의 감정인 '분노'에 대한 주제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미리 관객들에게 받은 '나를 화나게 만든 일에 대한 사연'을 소재로 관객들과 대화를 나누며 즉흥극을 펼친다. '월하가요'는 관객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공연이다. 각 가문은 무작위로 주어졌지만 관객의 선택으로 배우를 따라 이동하며 각자 다른 이야기를 보게 된다. 네 가문이 서로 다른 두 개의 이야기를 나누고 펼쳐 모든 이야기를 보기 위해서는 8번을 관람해야 한다. 또 각 가문마다 상징적 제스처가 있는데 관객들은 각 가문 가이드의 안내로 제스처를 따라 하며 마치 가문의 응원단처럼 네 가문의 갈등과 화해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극은 '한여름 밤의 꿈'과는 다른 결말을 맺으며 화합과 화해의 메시지를 전한다. 그러나 '월하가요'의 매력은 이야기가 주는 메시지보다 역사성과 전통이 느껴지는 고풍스러운 고택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경험한다는 데 있다.

고택 이머시브 공연 '월하가요'는 기존 문화 유적지를 바탕으로 한 작품들이 공간을 홍보하거나 혹은 유적지를 무대 배경으로만 삼으려는 경향에서 벗어나 대중적으로 경쟁력 있는 콘텐츠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선교장을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 플레저, 퓨리, 새드, 펀 등 외국어로 네 가문을 명칭 해야 했는지는 의문이다. 또한 이야기가 현대적 변형이나 해석이 부족하고 익숙한 플롯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은 아쉽다. 초연인 만큼 수정, 보완의 과정을 거쳐 완성도를 높여가리라 믿는다. 이렇게 만들어진 콘텐츠가 한 차례의 이벤트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시적 지역 콘텐츠로 자리 잡기 위한 노력과 고민은 강릉시와 제작사의 남은 과제다.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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