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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세계사-미국사의 상징이 된 대결

입력
2023.06.19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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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9 막스 슈멜링 V. 조 루이스

1938년 재대결을 앞두고 체중 검사장에서 만난 슈멜링(왼쪽)과 루이스. 위키피디아

1938년 재대결을 앞두고 체중 검사장에서 만난 슈멜링(왼쪽)과 루이스. 위키피디아

6월 19일은 미 연방정부가 2021년 연방공휴일로 제정한 ‘준틴스(Juneteenth)’ 즉 흑인노예해방 기념일이다. 1865년 노예제를 완강히 고수하던 텍사스주 갤버스턴에 연방군이 진주한 날. 노예해방 선언 2년여 뒤였고 내전도 끝났지만, 갤버스턴 흑인 노예들은 그제야 자신들이 해방된 사실을 알았다. 그들이 이듬해부터 벌인 축제는 준틴스의 기원이 됐다.

독일 헤비급 복서 막스 슈멜링(1905~2005)과 미국 흑인 복서 조 루이스(1914~1981)의 세기의 첫 대결도 1936년 준틴스에 펼쳐졌다. 1924년 데뷔해 유럽을 석권하고 28년 미국으로 건너와 승승장구하던 백인 스타와 34년 데뷔해 27전 전승(23KO승)을 거두던 흑인 스타의 논타이틀 매치. 뉴욕 양키스 스타디움 4만2,000여 백인 관중은 일방적으로 슈멜링을 응원했다. 만 22세 루이스는 슈멜링의 노련한 페이스에 말려 KO패했고, 아들 루이스 Jr는 훗날 “아버지는(…흑인 축제날에) 모든 흑인을 실망시킨 셈이었다”고 말했다.

둘은 1938년 6월 다시 맞붙었다. 나치가 뉘른베르크 인종법을 제정하고 부헨발트에 강제수용소를 열고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직후였다. 히틀러는 슈멜링을, 본인 의사와 무관하게, 아리안족과 나치의 상징으로 선전했다.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도 시합 전 루이스를 백악관에 초청해 “조, 독일을 이기려면 당신 근육이 필요하다”며 응원했다.

흑백 인종대결은 2년 사이 파시즘과 자유주의의 대결, 히틀러와 루스벨트의 대결로 바뀌었다. 루이스는 1라운드 2분 4초 만에 슈멜링을 TKO로 제압했고, 경기장 7만5,000여 관중은 이번에는 루이스를 응원했다. 아들 루이스 Jr는 “아버지는 백인을 죽이지 않고도 모든 신문 1면을 장식했다”고 회고했다.

조국을 사랑했지만 나치정부는 혐오했던 슈멜링과 인종주의는 혐오했지만 백인은 혐오하지 않았던 루이스는 링에서도 바깥에서도 서로 존중하며 평생 친구로 지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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