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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길 뛰어들어 8명 구하는데... "어디예요?" 반복하는 119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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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길 뛰어들어 8명 구하는데... "어디예요?" 반복하는 119 [영상]

입력
2023.05.28 07:00
수정
2023.06.01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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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당시 119 상황실 신고전화 녹음파일 입수]
“‘위치 어디?', '주소 어디?', '상황 어때?' 되풀이”
“위치추적하고 인근 가면 불길 뻔히 보이는데…”
“세월호·이태원 참사 후에도 바뀌지 않는 소방”

불길에 뛰어들어 8명을 대피시켰다고 밝힌 한 남성이 구조활동을 하면서 다급하게 119 신고전화를 했지만, 소방관은 전화를 건 지 3분이 다 되도록 위치정보 관련 질문을 반복한 것으로 나타났다. 세월호·이태원 참사에서 드러난 소방당국의 신고접수·초동대응 문제가 여전하다는 평가다. 신고자에게 위치정보 관련 질문은 줄이고, 행동요령 안내는 더하도록 제도를 개선하고 관행을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다.

인천 미추홀구에서 자영업을 하는 조인수(39)씨는 지난달 4일 오전 10시 17분쯤 자신의 점포 인근 빌라 옥상에서 불이 나자 개인보호장비 없이 사고 현장에 뛰어들어 노인 8명을 대피시켰다고 밝혔다. 이후 그는 기침, 호흡곤란, 가슴통증 등 증세로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치료비는 본인이 부담해야 했다며 지난 17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사람은 구했지만 돌아오는 건 후회였습니다'란 제목의 글을 올려 화제가 됐다.

사고 당일 오전 10시 23분쯤 조씨가 화재 현장에서 119로 신고한 전화 통화 녹음파일에 따르면 인천소방 119 종합상황실은 19초가량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후 전화를 받은 소방관은 “○○빌리지예요?”라고 물은 뒤 “거기가 어디예요? 정확한 위치가? 출동하고 있거든요”라고 되물어 조씨로부터 “○○동 ○○-10번지”란 답을 듣는다. 조씨가 전화를 건 지 37초, 통화 연결이 된 지 18초 만이다.

하지만 소방관은 이후에도 조씨에게 위치정보를 집요하게 묻는다. 3분 동안 “불이야”를 12차례나 외치면서 연신 기침하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현장의 유일한 민간인 구조자에게 “몇 층에서 불나요?” 같은 질문을 계속하는 것이다. 도움말은 하지 않고 상황보고를 계속 요구하는 셈이다.

이후에도 조씨는 “불났어요, 사람 나오세요, 내려오세요”라고 소리치며 건물 안 계단에서 동분서주하다가 숨을 잘 쉬지 못하는 듯 기침을 계속한다. 하지만 신고전화를 받은 소방관은 이때까지도 조씨에게 유의하라는 경고 한마디 하지 않고, 행동요령도 안내하지 않는다.

이후에도 이 소방관은 “거기가 혹시 무슨 빌라예요?”, “○○동 ○○-10번지 맞아요?”, “거기 어디서 불이 나는 거예요?”, “몇 층에서?”, “그러니까 몇 층에서 불나요?”, “전체에서 연기가 계속 다 나요?”, “옥상 같아요?”, “○○○빌리지 맞아요? ○○○빌리지”등 비슷한 질문을 계속한다.

"소리치며 숨차하는 구조자에게 느긋한 목소리로… 위치정보 질문 반복"

지난달 4일 불이 난 인천 미추홀구 한 빌라에 뛰어들어 노인 8명을 구조했다고 밝힌 조인수(39)씨가 23일 화재 현장에서 사고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인천=홍인기 기자

지난달 4일 불이 난 인천 미추홀구 한 빌라에 뛰어들어 노인 8명을 구조했다고 밝힌 조인수(39)씨가 23일 화재 현장에서 사고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인천=홍인기 기자

이 소방관은 조씨가 전화를 걸기 시작한 지 2분 47초쯤 지난 후에야 심하게 기침하는 그에게 “현재 사람들 다 나왔어요?”라며 “선생님 일단 그쪽으로 나오세요”라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행동요령 관련 얘기를 한다. 결국 조씨가 전화를 건 지 3분이 다 되도록 이 소방관이 조씨에게 수십 개의 비슷한 질문을 던지고 들은 답은 처음과 똑같은 “○○-10번지”였다.

조씨는 “스마트폰 위치추적으로는 신고자 위치의 수백 미터 반경 범위 정도가 확인된다고 하지만, 당시 불길이 건물 옥상에서 4미터가량 치솟은 상태라 인근에 오면 금방 알 수 있었는데 (소방관이) 정확한 (사고 현장) 주소와 빌라 이름만 꼬치꼬치 물어보니 답답했다”며 “결국 구조를 하다가 건물 밖으로 나와 주소 표지판을 보고 알려줘야 했다”고 말했다. 화재신고를 받은 소방관이 당시 사고 현장에서 유일하게 구조활동을 하던 조씨에게는 사실상 장애가 된 셈이다. 그는 아찔했던 사고 당시를 회상하며 “화재 상황 관련 지시는 받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조씨는 당시 불이 옥상에서 났지만 좁은 계단 사이로 유독가스가 흘러나와 독한 냄새가 건물 안에 널리 퍼졌다고 전했다. 본보가 23일 사고 현장을 찾아 확인한 결과 플라스틱 재질로 보이는 건물 옥상 외벽이 검게 그을린 상태였으며, 인근에는 담배꽁초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구급차 타니 이번엔 "'이름 뭐냐', '주소 어디냐'… 같은 질문 되풀이"

지난달 4일 불이 난 인천 미추홀구 한 빌라에 뛰어들어 노인 8명을 구조했다고 밝힌 조인수(39)씨가 화재 당시 유독가스가 자욱했던 빌라 안의 좁은 계단을 뛰어다니며 주민들에게 대피하라고 소리치던 사고 당시 상황을 23일 재현하고 있다. 인천=홍인기 기자

지난달 4일 불이 난 인천 미추홀구 한 빌라에 뛰어들어 노인 8명을 구조했다고 밝힌 조인수(39)씨가 화재 당시 유독가스가 자욱했던 빌라 안의 좁은 계단을 뛰어다니며 주민들에게 대피하라고 소리치던 사고 당시 상황을 23일 재현하고 있다. 인천=홍인기 기자

조씨가 사고 현장을 빠져나온 이후에도 이 같은 소방관의 질문 공세는 이어졌다. 자신의 점포로 복귀하려던 조씨는 호흡곤란을 느껴 인근 길가에 서 있던 구급차에 다가갔다고 한다. 그는 구급대원에게 “저기(화재 현장)서 유독가스를 많이 마셔서 힘들고 아프다”고 호소했으며, “치료를 받으시겠냐”고 묻는 대원에게 “그러겠다”고 한 뒤 구급차에 올랐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엔 숨 가쁜 소리를 내는 조씨에게 구급대원이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묻기를 되풀이했다고 한다. 조씨는 “당시 구급대원이 제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4, 5번은 물어봤던 것 같다”며 “몸이 너무 아팠는데 구급차 안에서 산소호흡기는 끼우지 않았으며, 알약 하나 받아먹지 못한 채 9분가량 인근 병원 응급실로 이동했다. 구급차는 사이렌을 울리다 말다 하며 차량 흐름에 맞춰 이동했다”고 말했다. 소방관이 조씨의 얘기를 잘 알아듣지 못할 정도의 상황은 아니었다는 취지다. 조씨는 “구급차가 현장에 도착한 후에도 (응급실 대기환자 탓인지) 5분가량 별다른 조치 없이 구급차 안에서 더 기다렸다”고 전했다.

당시 사고 현장의 유독가스로 인해 느낀 고통의 정도를 묻자 조씨는 “3분의 시간 동안 군대 화생방 훈련장에 4~5시간 갇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요즘도 가슴 통증을 종종 느낀다”고 답했다. 조씨는 응급실에서 기도 확장과 수액 공급 등 처치를 받은 후에야 안정을 되찾았다고 한다.

이후 조씨는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된 글에서 구호활동을 하다 구급차를 타고 병원 응급실에 실려간 사람에게 사비로 치료비를 낼 것을 요구하는 데 문제를 제기했다. “소방에서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던 미추홀소방서 측은 사건 관련 보도 이후, 조씨에게 전화를 걸어와 “‘의사상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의사상자법)에 의해 (보상) 신청을 할 수 있다. 구청에 신청을 하면 소방에서 필요한 서류를 내주겠다”고 안내했다고 한다. 앞서 소방당국은 “소방대장이 소방활동종사명령을 통해 그 현장에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불을 끄게 하다 다친 경우 지원하는 법률은 있으나, 소방대가 도착하기 전에 화재를 진압하다 다친 사람에게 지원하는 소방법은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에 조씨는 이 같은 경우 본인이 직접 구청에 가서 보상 신청을 하도록 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인명구조를 하다 구급차를 타고 이송된 사람이 치료비를 사비로 지급하고, 이후 구청에 가서 직접 자신이 한 일을 일일이 설명하고 증빙하도록 제도를 만들어 놓으면, 남을 구하러 뛰어들려고 해도 망설일 수밖에 없지 않겠나”라며 “제 치료비는 소액이었고 의료실비보험 가입자라 괜찮다 쳐도, 저 같은 상황이 아닌 사람이 남을 돕다가 다쳤는데 이 같은 일을 겪는다면 어떻겠나”라고 했다.

"신고자 상황 빨리 파악할 수 있는 경험 많고 유능한 소방관 배치해야"

지난달 4일 불이 난 인천 미추홀구 한 빌라에 뛰어들어 노인 8명을 구조했다고 밝힌 조인수(39)씨가 23일 빌라 옥상에 널려 있는 담배꽁초를 바라보며 사고 당시 불길이 치솟던 곳을 가리키고 있다. 인천=홍인기 기자

지난달 4일 불이 난 인천 미추홀구 한 빌라에 뛰어들어 노인 8명을 구조했다고 밝힌 조인수(39)씨가 23일 빌라 옥상에 널려 있는 담배꽁초를 바라보며 사고 당시 불길이 치솟던 곳을 가리키고 있다. 인천=홍인기 기자

당시 상황을 놓고 소방방재 전문가들은 우선 119 종합상황실에 '베테랑' 소방관을 배치하고, 신고 절차를 간소화할 필요가 있다고 진단했다. 공하성 우석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119 상황실은 근무가 고되고 민원 소지도 많아 통상 소방 내에서는 기피 부서로 분류되며, 경력이 짧은 소방관이 배치되는 경우가 많다”며 “미국은 이런 부서일수록 신고자의 상황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고, 지역 사정을 잘 아는 유능한 소방관을 배치해 사고 초동 대처를 잘할 수 있도록 한다”고 말했다.

응급상황에서 신고자에게 위치정보를 묻고 또 묻는 신고접수 행태도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다. 조성일 서울시립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위급한 상황에서 신고한 사람에게 소방이 ‘위치가 어디냐', '주소가 어디냐', '상황이 어떠냐’만 계속 묻는 문제가 세월호·이태원 참사 이후에도 바뀌지 않고 있다”며 “스마트폰 사진에는 위치정보가 다 들어가 있기 때문에, 사진 한 장으로도 신고를 할 수 있게 하는 등의 제도 개선을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사고 현장 위치정보는 소방당국이 신고자의 휴대폰 위치정보, 사진 위치정보, 폐쇄회로(CC)TV 조회결과의 유관기관 공유 등 발전된 기술을 통해 빨리 파악하고, 신고자에게는 행동요령 안내를 주로 하는 게 마땅하다는 뜻이다.

119 구급대의 대응도 미숙했던 것으로 보인다는 평가다. 공 교수는 “(구급차 이송과정에서) 환자 신원 파악이 우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매뉴얼이라면 개선될 필요가 있다”며 “호흡곤란을 겪어 구급차를 탄 상황이라면 당연히 응급조치부터 빨리 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이웃을 구조한 시민 대상 보상 절차도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공 교수는 “민간인이 응급상황에서 이웃을 돕는 것을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장려하는 차원에서라도 치료비 등을 보상하는 지원책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응용 소프트웨어(앱) 등을 활용해 보상 신청 절차를 간소화할 필요도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사건에서와 같은 소방 대응은) 위급상황에 뛰어들면 손해를 본다는 학습효과를 주기 때문에, 이를 뒤집을 수 있는 정책을 많이 추진해야 한다”며 “응급상황에서 남을 도우면 국가나 지자체로부터 보상이 돌아오고, 혹시 선의로 한 일이 결과적으로 잘못되더라도 책임을 묻지 않도록 하는 법률을 세밀하게 검토,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위치정보 질문 후 대피 안내"… "신고자 안정 위해 차분한 목소리" 반론

인천소방본부는 “(화재 당시 119 상황요원이) 화재 발생 주소, 빌라 명칭, 발생 층, 인명 대피 여부를 물어본 후 신고자(조씨)에게 대피하도록 안내했다”며 “상황실에서는 신고자가 흥분상태 시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신고자를 안정시키며, 침착하고 차분하게 대응한다”고 해명했다. 이어 본부는 “사고 당시 가좌구급대가 출동해 현장을 출발한 지 8분 만에 병원에 도착했으며, 혈압·맥박·호흡·체온·산소포화도 등 활력징후를 살폈다”고 밝혔다. 본부는 “처음에는 (조씨에게 치료비) 관련 지원을 해줄 수 있는 (소방)법령이 없어 안내하지 못했다”며 “이후 관련 보도가 나와 소방법 외에 다른 지원책을 찾던 중 ‘의사상자법’을 확인해 당사자와 통화해 안내했다”고 덧붙였다.

김청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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