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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자만 집요하게 사냥... 공원에서 13명 목숨 앗아간 '무지개 미치광이'

입력
2023.05.26 04:30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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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브라질 파투리스 공원 연쇄살인사건

편집자주

‘콜드케이스(cold case)’는 오랜 시간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는 범죄사건을 뜻하는 말로, 동명의 미국 드라마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일보>는 격주 금요일 세계 각국의 미제사건과 진실을 좇는 사람들의 노력을 소개합니다.


2016년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열린 프라이드 퀴어 퍼레이드에서 한 참가자가 몸에 포르투갈어로 '우리를 죽이는 걸 멈춰라' 라는 문구를 적은 채 무지개색 프라이드 깃발을 들고 있다. 상파울루=AFP 연합뉴스

2016년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열린 프라이드 퀴어 퍼레이드에서 한 참가자가 몸에 포르투갈어로 '우리를 죽이는 걸 멈춰라' 라는 문구를 적은 채 무지개색 프라이드 깃발을 들고 있다. 상파울루=AFP 연합뉴스

2007년 브라질의 한 공원은 ‘살인의 중심지’였다. 찾아가면 어렵지 않게 살해된 시신을 볼 수 있었다. 며칠에 한 번꼴로 시신이 발견되는 날도 있었다. 사인은 대부분 총기에 의한 살해. 피해자는 20~50대의 남성들이었다. 그러나 수사 당국에서는 '흔한 총기 살인'이라며 주목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사건들의 숨겨진 ‘특이점’을 간과한 대가는 너무나 컸다. 10건을 훌쩍 넘긴 ‘공원 의문사’는 단순 총기 사건이나 갱단의 횡포가 아니었다. 한 명이 저지른 연쇄살인, 그것도 동성애자 남성만을 집요하게 노린 증오 범죄로 밝혀졌다. 현지 언론들은 이 연쇄살인범을 ‘레인보우 마니악(Rainbow Maniac·무지개 미치광이)’이라고 불렀다. 성소수자 연대를 뜻하는 '프라이드' 깃발의 무지개색에서 딴 이름이었다.

동네 공원서 1년간 시신 13구 발견

2007년 7월 4일 브라질 상파울루 교외인 카라피쿠이바시(市)의 파투리스 공원에서 32세 남성 조제 엔리크가 권총에 맞아 사망한 채로 발견됐다. 엔리크의 시신은 하의를 탈의한 상태로 공원 덤불 속에 방치돼 있었고 후두부엔 총상이 있었다. 용의자는 종잡을 수 없었고, 불과 나흘 후 이곳에서 또 시신이 나왔다. 닷새 후에도 피살 사건이 일어났다.

브라질 경찰은 그러나 개별적인 변사 사건으로만 봤다. 같은 공원에서 8월 두 명이, 9월과 10월 각각 한 명이 사망한 채 발견됐어도 마찬가지였다. 한동안 잠잠하다 다음 해 2월 두 명이 살해됐고, 5월에 한 명, 7월과 8월엔 2, 3주 간격을 두고 3명의 시신이 나왔다. 결국 2007년 7월부터 2008년 8월까지, 1년여 동안 남성 13명이 파투리스 공원에서 살해된 셈인데, 지역 공원임을 감안하면 터무니없이 잦은 빈도였다. 경찰은 그제서야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브라질 상파울루 교외의 파투리스 공원에서 발생한 연쇄살인 사건에 대한 수사가 본격화한 2008년, 파투리스 공원을 순찰 중이던 경찰관 2명이 한 행인의 소지품을 수색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브라질 상파울루 교외의 파투리스 공원에서 발생한 연쇄살인 사건에 대한 수사가 본격화한 2008년, 파투리스 공원을 순찰 중이던 경찰관 2명이 한 행인의 소지품을 수색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사실 두 번째의 죽음 이후부터는 ‘기시감’이 있었다. 피해자들은 발견 당시 하의가 벗겨진 상태였고, 뒤통수에 총을 맞았으며, 시신은 덤불 속에 유기됐다. 미제로 남았던 엔리크 사건 때와 똑같았다. 단순 살인이 아니라고 직감한 경찰은 특별 대응팀을 꾸려 각 사건들 간의 연관성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수사 초기 경찰은 갱단에 의한 '무작위 처형’ 범행을 의심했다. 남성이라는 성별 외엔, 피해자들의 공통점이 없었다. 연령대나 직업 등은 모두 제각각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지며 수사는 급물살을 탔다. 각각의 살인 사건에 쓰인 총의 탄도와 흔적 등을 분석한 결과, 모두 동일한 총기에 의한 범죄임이 드러났다. 한 명의 범인이 일으킨 연쇄살인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희생자들에겐 또 다른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동성애자였다. 미국 NBC방송에 따르면, 범행 현장이었던 파투리스 공원은 게이들 사이에서 ‘만남의 장소’로 통하던 장소였다. 2008년 12월 브라질 경찰은 “파투리스 공원에서 발생한 연쇄살인 사건은 게이들을 대상으로 한 증오 범죄”라고 발표했다.

‘게이만 골라’ 사냥하는 연쇄살인범

2018년 6월 3일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열린 연례 게이 프라이드 퍼레이드 도중 참가자들이 대형 무지개 깃발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상파울루=AP 연합뉴스

2018년 6월 3일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열린 연례 게이 프라이드 퍼레이드 도중 참가자들이 대형 무지개 깃발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상파울루=AP 연합뉴스

수사를 지휘한 파울루 포르투나토 카라피쿠이바 경찰서장은 “상파울루에서 살인이나 폭력은 드물지 않은 일이지만, 이번 범인은 일반적 범죄의 수준을 넘어섰다”고 밝혔다. 범인이 피해자들을 살해한 후 하의를 벗겨 모욕을 준 ‘시그니처(범죄자가 범행마다 고의로 남기는 표식)’에서 증오 기반 연쇄살인의 성격이 뚜렷했다고 본 것이다. 경찰은 범인이 게이들의 집결 장소인 파투리스 공원에 혐오감을 느껴 그곳을 살인으로 ‘청소’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경찰의 눈길을 끈 건 살인의 시점이었다. 첫 번째 살인은 매년 6월 상파울루에서 열리는 ‘게이 프라이드(Pride)’ 퍼레이드가 끝난 지 고작 며칠 뒤에 일어났다. 2007년과 2008년 모두 퍼레이드의 열기가 채 가시기 전인 7, 8월에 가장 많은 희생자가 몰렸다. 브라질 일간지 ‘폴랴지상파울루’ 등 현지 언론들은 퍼레이드가 동성애를 혐오하는 범인의 ‘버튼’이 됐다고 보도했다.

초반에는 총알 한 방으로 피해자의 숨통을 끊었던 범인은 살인을 거듭할수록 분노를 더 격하게 드러냈다. 특히 2008년 8월 발견된 마지막 피해자는 총탄을 12발이나 맞았다. 영국 가디언은 브라질 경찰 관계자를 인용해 “총알이 우박처럼 피해자의 전신을 난자해 신원을 확인할 수 없을 정도의 가학성을 보였다”고 전했다.

최초 목격자·전직 경찰... 범인은 누구

2008년 12월 10일 '은퇴한 브라질 경찰관이 13명의 게이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됐다'는 외신 보도(위 사진)가 나왔다. 아래 사진은 브라질 상파울루 파투리스 공원을 순찰 중인 경찰차의 모습. 위키피디아 캡처

2008년 12월 10일 '은퇴한 브라질 경찰관이 13명의 게이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됐다'는 외신 보도(위 사진)가 나왔다. 아래 사진은 브라질 상파울루 파투리스 공원을 순찰 중인 경찰차의 모습. 위키피디아 캡처

경찰은 수사 초기 파투리스 공원에서 나온 시신들 중 3구를 발견한 남성을 용의자로 지목했다. 살인 사건의 최초 목격자는 항상 핵심 조사 대상인데, 세 번이나 겹치는 경우가 드물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그의 몸에서 총격 흔적이 나오지 않아 혐의가 풀렸다. 현지 언론에 ‘레오나르도’라는 가명으로 보도된 이 남성은 동성애자로, 데이트를 위해 파투리스 공원을 자주 찾을 뿐이었다.

그러던 중 수사팀은 한 가지 가설에 주목했다. 범인은 38구경 권총으로 피해자들을 살해했는데, 이는 주(州) 경찰에 지급되는 총기였다. 용의자가 경찰 내부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2008년 12월 10일, 경찰은 46세의 슈퍼마켓 경비원 자이로 프랑코를 체포했다. 그는 은퇴한 전직 주 경찰관이었다. 그해 8월 19일 프랑코가 흑인 게이 남성에게 총을 12발 쏘는 모습을 봤다는 목격자 증언이 있었고, 또 다른 목격자도 프랑코가 파투리스 공원을 자주 어슬렁댔다고 제보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말’ 이외엔 프랑코의 혐의를 입증할 핵심 물증이 없었다. 2011년 8월 23일 프랑코는 배심원단으로부터 4대 2의 무죄 평결을 받고 풀려났다. 게다가 프랑코가 구금된 후인 2009년 3월에도 25세의 게이 청년이 파투리스 공원 부근에서 살해당한 채 발견돼 혼란이 일기도 했다. 이 사건 피해자도 이전 사건에서처럼 하의가 벗겨져 진범은 따로 있다는 이야기가 돌았으나, 흉기가 38구경 권총이 아니라 몽둥이였다는 점에서 모방범죄라는 데 무게가 실렸다.프랑코의 석방 이후, 13건의 연쇄살인과 2009년의 모방살인 모두 미제로 남았다.

세계에서 퀴어 ‘프라이드’ 가장 높은 나라, 브라질의 이면

지난해 국제 호모포비아(동성애혐오) 반대의 날인 5월 17일 브라질의 수도 브라질리아 국회의사당 건물에 '성소수자 연대'를 뜻하는 프라이드 깃발의 무지개색이 투사되고 있다. 브라질리아=로이터 연합뉴스

지난해 국제 호모포비아(동성애혐오) 반대의 날인 5월 17일 브라질의 수도 브라질리아 국회의사당 건물에 '성소수자 연대'를 뜻하는 프라이드 깃발의 무지개색이 투사되고 있다. 브라질리아=로이터 연합뉴스

브라질은 성소수자에겐 가장 '친밀한' 국가 중 하나다. 2013년 동성 결혼이 사실상 합법화되기 전인 2003년 이민을 전제로 한 동성 결합을 인정했고, 동성 커플의 입양도 허용했다. ‘게이가 에이즈를 옮긴다’며 손가락질하는 게 일반적이었던 1996년, 당국이 직접 나서 HIV 양성 환자에게 무료 항바이러스제를 제공한 최초의 나라이기도 하다. 상파울루에서 매년 열리는 프라이드 축제는 300만 명 이상이 모이는 세계 최대 규모의 퀴어 퍼레이드다.

하지만 파투리스 공원 연쇄살인 사건을 계기로 브라질의 어두운 면이 드러났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브라질은 성소수자에게 가장 열려 있는 나라인 동시에, 가장 많은 성소수자가 살해되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브라질 인권단체 ‘바이아게이그룹’에 따르면, 2007년 브라질에서 증오 범죄로 살해된 성소수자는 122명이다. 같은 해 미국(25명), 멕시코(35명)를 훌쩍 웃돈다. 피해 집계가 시작된 1980년부터 2006년까지, 브라질에서는 최소 2,680명의 성소수자가 증오 범죄로 목숨을 잃었다. 거리를 가득 채운 프라이드 퍼레이드는 무척이나 화려했던 반면, 어두컴컴한 공원 구석에선 성소수자들이 잇따라 살해되며 존재 자체가 지워졌다.

초반에 범인으로 몰렸던 ‘최초 목격자’ 레오나르도는 이후 수사에서 오히려 게이 커뮤니티와 경찰 간 연락책을 자처해 용의자에 대한 목격담을 수집하고,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해 힘썼다. 그는 ‘왜 이렇게까지 하느냐’는 언론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사람들은 우리가 처한 위험을 알고 있지만 신경 쓰지 않습니다. 이 괴팍한 일로 우리는 ‘만남의 장소’를 잃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이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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