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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바꾼 이성의 음료? 그 한잔엔 부의 달콤함과 착취의 쓴 맛이

입력
2023.05.23 04:30
14면
0 0

<5> 커피에 비친 낭만과 잔혹
전 세계 '이성의 음료' 커피에 열광
미 보스턴 차사건 계기, 커피로 전환
남북전쟁, 남군에 커피 공급 차단
스타벅스, 전 세계 커피 시장 압도
커피로 돈 버는 쪽은 다국적 기업
자본의 탐욕과 착취가 담기기도

편집자주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숫자로 표현되는 경제학 역시 오랜 역사를 거치며 정립됐습니다. 어려운 경제학을 익숙한 세계사 속 인물, 사건을 통해 쉽고 재미있게 풀어보려 합니다. 경제 관료 출신으로 울산과학기술원(UNIST) 글로벌산학협력 센터장으로 근무하는 조원경 교수가 들려주는 ‘세계사로 읽는 경제’는 3주에 한 번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요즘 쌀 소비는 줄어드는데 커피 소비가 줄어든다는 말은 들리지 않는다. 조상들이 마시지 않던 커피는 언제 우리나라에 들어와 이렇게 인기가 높아진 걸까? 우리나라에 커피가 처음으로 들어온 시기는 1890년 전후로 추정된다. 커피에 대한 최초 기록은 유길준이 1895년 쓴 ‘서유견문’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우리가 숭늉을 마시듯 서양인은 커피를 마신다고 소개했다. 이는 에티오피아의 양치기가 커피를 처음 발견한 때로부터 1000년쯤 지난 뒤의 일이다. 네덜란드인에 의해 이웃 일본에 커피가 상륙한 지 170년쯤 지난 후이다. 누군가는 맛과 향 때문에, 누군가는 피로를 풀어주고 활력을 주는 기능 때문에, 누군가는 만남과 대화를 위해 커피를 마신다. 한국인 최초의 커피 애호가는 누구였을까? 고종의 커피 사랑은 유명한 이야기다. 그에게 자주 커피를 대접했던 독일 여인 손탁이 1902년 손탁호텔 안에 세운 ‘정동구락부’라는 곳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커피를 판매했다. 당시만 해도 커피는 지체 높은 양반이나 외국인이 즐기는 기호 식품이었다.


커피를 발견한 것으로 전해지는 에티오피아 염소치기 소년 '칼디'. 에티오피아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음료인 커피의 탄생지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커피를 발견한 것으로 전해지는 에티오피아 염소치기 소년 '칼디'. 에티오피아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음료인 커피의 탄생지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커피의 유래와 관련해 여러 이야기가 있다. 이탈리아 언어학자인 파우스투스 나이론(Faustus Nairon)이 1671년에 출판한 책에 나오는 이야기를 들어보자. 에티오피아에 염소치기 칼디가 있었다. 어느 날 칼디는 키우던 염소들이 한 나무 열매를 먹고 밤늦게까지 잠을 못 자는 것을 알게 된다. 열매를 따 수도원장을 찾아가 사실을 말하자 원장은 쓸데없는 이야기라며 열매를 불 속에 던진다. 그러자 열매가 구워지며 향긋한 냄새가 난다. 열매를 갈아 물에 녹여 마셔보니 한밤중까지 정신이 또렷했다.

커피 속의 카페인은 뇌의 혈관을 확장시키고 신경세포를 자극해 기분을 좋게 만드는 효능이 있다. 더 많은 주의력과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수도원 수도사들이 철야 기도를 할 때 열매로 만든 음료를 마시고 밤새 맑은 정신으로 정진할 수 있다. 사람들은 점차 종교적 의미보다는 커피의 향과 맛에 탐닉하게 된다. 이슬람 세계에서 특히 커피가 널리 보급된 이유는 뭘까? 술이 금지돼 다른 기호음료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유럽 여행자들은 터키에서 검은 음료를 보고는 혐오감을 느꼈으나 이내 그 매력에 빠져들고 만다. 17세기 초에는 유럽 최초의 커피 하우스가 이탈리아에서 문을 열었고, 영국, 프랑스 등 유럽 여러 나라에 커피 하우스가 생겼다. 영국에서는 2,000여 개의 커피 하우스가 생길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17세기 후반에는 영국의 왕 찰스 2세가 커피 하우스가 혁명의 발원지라는 정치적 이유를 들고는 모든 커피 하우스를 폐쇄하는 명령을 내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 국민들의 심한 반대에 부딪혀 법령이 발효되기 전에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커피가 가진 경제사적 의미를 역사의 명장면을 통해 살펴보자.

우선, 근대에 이르러 감상의 음료인 중세의 와인을 대신해 이성의 음료인 커피의 시대가 도래한 점이다. 커피가 갖고 있는 각성 작용은 세계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미국이 비싼 찻잎을 영국으로부터 수입하는 대신 커피를 마신 것이 세계를 제패하게 된 근저라는 주장은 그럴듯해 보인다. 미국은 1773년 보스턴 차 사건 이후로 차에서 커피로 음료를 전환했다. 차와 커피는 지금도 세계 음료 시장을 지배하는 품목이다. 차를 마실 때는 'Tea Time'이라고 하고 커피를 마실 때 'Break Time'이라고 하는 데서 어떤 느낌이 들까? 쉬고 싶을 때는 차를 마시고, 각성하고 다시 일해야 할 때는 커피를 마시기에 그런 말이 생긴 게 아닐까.


남북전쟁 당시 북군이 휴식 시간(Break Time)에 커피를 마시고 있다. 전쟁 기간 남군 지역 항구가 봉쇄당해 커피를 공급받지 못한 남군은 커피 금단 현상에 고전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American Battlefield Trust 발췌

남북전쟁 당시 북군이 휴식 시간(Break Time)에 커피를 마시고 있다. 전쟁 기간 남군 지역 항구가 봉쇄당해 커피를 공급받지 못한 남군은 커피 금단 현상에 고전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American Battlefield Trust 발췌


이러한 문화는 미국의 독립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설이 제기된다. 여유로운 기분의 홍차에서 각성작용이 강한 커피로 전환한 것이 미국이 세계를 제패하게 된 하나의 보이지 않는 원인이란 주장이다. 1861년부터 1865년까지 발발한 미국의 남북전쟁에서 발현된 커피의 위력은 대단했다. 북군의 링컨 대통령은 1862년 남군 지역의 항구를 봉쇄했다. 그 결과 남군은 전쟁 내내 커피를 공급받지 못했다. 커피 금단 현상으로 남군은 고생했고 그들의 주둔지가 담배 생산지와 인접해 있어서 휴전이 이어질 때면 담배와 커피를 맞바꾸자고 북군에 요청했다. 커피가 남북전쟁의 승패를 가른 중요한 원인이었다면 과장일까.


프랑스 황제였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도 커피 애호가였다. AZ AUOTES 발췌

프랑스 황제였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도 커피 애호가였다. AZ AUOTES 발췌


둘째, 나폴레옹과 커피의 역사는 아픔으로 가득 찬 이야기일지 모르겠다. 나폴레옹은 대단한 커피 애호가였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내게 정신을 차리게 만드는 것은 진한 커피, 아주 진한 커피이다. 커피는 내게 온기를 주고, 특이한 힘과 기쁨과 쾌락이 동반된 고통을 불러일으킨다.”

1805년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영국의 넬슨 함대에 패한 나폴레옹은 대륙 봉쇄령을 내려 영국을 고립시키고자 했다. 이로 인해 영국의 선박이 묶이면서 배편이 부족해 서인도제도에서 싣고 오던 설탕 유입이 차단된다. 프랑스를 비롯한 대륙 국가들은 설탕 공급을 받을 수 없게 돼 곤란에 처하게 됐다. 프랑스에서는 사탕수수가 아닌 사탕무에서 설탕을 추출하는 기술을 개발해 이 문제를 해결해 나갔고 사탕수수는 더 이상 매력적인 무역상품이 되지 않았다. 이 시기는 유럽 전역에 카페들이 차례로 문을 열며 본격적으로 커피 수요량이 폭증한 시기와 맞물렸다. 커피가 사탕수수를 대신해 유럽 국가들에 부를 선사하는 신상품으로 급부상했다. 서구 열강들은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커피 공급원을 늘려 나갔다. 네덜란드를 선두로 영국, 프랑스, 독일 같은 유럽 열강의 커피 재배 경쟁이 시작되며 노예무역의 잔혹사는 극에 달했다.


전 세계 스타벅스 매장에서 판매하는 라테 톨사이즈의 3개월 전 가격. 터키가 가장 저렴한 1.31달러이며 스위스가 7.17달러로 가장 비싸다. 세이빙스팟

전 세계 스타벅스 매장에서 판매하는 라테 톨사이즈의 3개월 전 가격. 터키가 가장 저렴한 1.31달러이며 스위스가 7.17달러로 가장 비싸다. 세이빙스팟


셋째, 스타벅스 지수다. 스타벅스는 미국의 시애틀에서 시작된 커피 전문점으로, 1971년에 개업했다. 처음에는 지역 커피 전문점으로 시작했으나 1980년대 후반부터 경영 방식과 브랜드 이미지를 개선해 빠른 성장을 이뤘다. 스타벅스는 고객에게 고품질 커피, 다양한 음료, 커피 문화와 철학을 제공하는 브랜드 이미지를 강조했다. 이를 통해 스타벅스는 커피 전문점이 아닌 하나의 라이프 스타일 브랜드로 자리 잡는다. 대규모 인수합병과 프랜차이즈 모델을 사용하며 세계 각국에서 빠르게 성장했다. 스타벅스는 전 세계 84개국에 3만5,711개(2022년 기준)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이들 매장에서 판매되는 커피 가격은 지역에 따라 다르다. 스타벅스 커피 가격은 해당 지역에서의 생활비 수준과 관련이 있다. 이 때문에 비공식적으로 스타벅스 지수로 경제 상황을 추정할 수 있다. 일개 브랜드 커피가 국가 경제 수준을 가늠하는 지표가 된 셈이다.

16세기 당대 최고의 아랍 시인들은 커피를 이렇게 찬양했다.

“오, 커피! 모든 번뇌를 잊게 하는 그대는 학자들에게는 갈망의 대상. 신의 벗이 마시는 음료, 지혜를 좇는 자들에게 건강을 선사하는 음료.”

커피를 찬양하는 그들을 생각하는데 문득 1934년 개봉한 영화 <물랭루즈>에 삽입된 문구가 떠오른다. ‘커피는 아침에, 키스는 밤에’

이 카피가 이토록 로맨틱하게 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달콤함보다 쓴맛의 이미지가 강한 커피가 사랑을 은유하는 게 정확할까? 누구에게 사랑이란 기쁨보다는 고독이고 고통일 수 있겠다.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커피 생산에 종사한다. 일부 다국적 기업은 이러한 생산자들을 착취하는 것으로 여전히 악명이 높다. 생산자들은 낮은 수입과 근로 조건에서 일하며, 종종 노동자 권리의 부족, 불안정한 일자리, 적절한 의료보장 및 안전한 근로 환경의 결여에 직면한다. 다국적 기업들은 글로벌 공급망의 각 단계에서 통제력을 갖고 있는 데 반해 생산자는 상대적으로 힘이 약하다.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커피를 즐기지만 정작 생산국인 아프리카 사람들은 커피를 여유롭게 즐기며 살아갈까? 커피를 통해 돈을 버는 쪽은 커피 생산국이 아닌 다국적 기업이다. 무한한 땅과 값싼 노동력을 원하는 자본의 탐욕과 착취를 생각해 본다. 다른 한편에는 정당한 보수와 근로조건 개선 요구를 묵살당하는 식민지 노동자들의 힘든 삶이 떠오른다. 커피 한잔의 여유 속에 아픈 기억이 너무 많아 보인다.


조원경 UNIST 글로벌산학협력 센터장

조원경 UNIST 글로벌산학협력 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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