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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곳 잃은 이태원 참사 추모공간 "기피시설 인식 바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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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곳 잃은 이태원 참사 추모공간 "기피시설 인식 바꿔야

입력
2023.05.12 04:30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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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분향소 설치된 지 100일
임시·항구 추모공간 필요성에는 공감
서울시는 서울광장 인근 사무실 제안
유족 "야외 아닌 건물 내부 부적합"
미국·영국은 사고 현장 도심에 조성
"희생자와 남은 사람들 공유 장소로"

8일 서울 중구 서울광장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 앞에서 열린 '10.29 이태원 참사 200일, 200시간 집중추모행동 주간' 선포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8일 서울 중구 서울광장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 앞에서 열린 '10.29 이태원 참사 200일, 200시간 집중추모행동 주간' 선포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달 14일이면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유족들이 서울광장에 분향소를 설치한 지 100일째다. 분향소를 불법 시설물로 간주한 서울시는 행정대집행(강제철거) 계고에 이어 변상금까지 부과했다. 유족들은 시에 분향소를 대신할 임시 추모공간 조성을 요구하고 있다. 대형 참사를 통해 경험한 아픈 기억을 잊지 않겠다는 측면에서 서울시도 임시시설은 물론이고 항구적 추모공간 조성 필요성에 동의한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 붕괴, 세월호 참사 등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추모공간 조성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시 “건물 3층에 임시 추모공간”…밀려나는 추모공간

서울시가 서울광장 인근 이태원 참사 임시 추모공간으로 제안한 건물 내부. 김재현 기자

서울시가 서울광장 인근 이태원 참사 임시 추모공간으로 제안한 건물 내부. 김재현 기자

추모공간 설치를 둘러싼 서울시와 이태원 참사 유족 간 대화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이태원동 지하철 녹사평역 지하 4층에 추모공간을 제안했다가 철회한 서울시는 서울광장 인근 건물의 3층 사무실(약 200㎡)을 임시 추모공간으로 제안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서울광장 근처에 교통 등 편의성을 고려해 정했다”며 “앞서 이태원유족지원센터로 활용했기 때문에 유족들이 이용하기도 적합하다”고 설명했다. 유족 측은 그러나 “광장이 아닌 건물 내부는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한 취지에 적합하지 않다”며 거절했다. 건물 내부에 추모공간이 마련될 경우 참사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줄어들 수밖에 없고, 정식 추모공간 조성에 수년이 걸리기 때문에 야외에 설치해야 한다는 게 유족 입장이다.

추모공간을 둘러싼 논란은 과거 대형 참사 때도 반복됐다. 32명이 목숨을 잃은 1994년 10월 성수대교 붕괴 사고 희생자 위령비는 사고 발생 3년 뒤인 1997년에서야 성수대교 북단에 설치됐다. 2005년 자동차 전용도로(강변북로) 진출입로가 생기면서 추모비는 걸어선 접근이 불가능한 '도로 위 섬'이 돼버렸다. 1995년 502명이 희생된 서울 서초동 삼풍백화점 붕괴 현장에는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다. 희생자 위령탑은 사고 현장과 6㎞가량 떨어진 양재동 ‘매헌시민의 숲’에 자리 잡았지만 위령탑 존재 여부를 아는 시민은 드물다.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 이후 서울 광화문광장에 설치됐던 ‘세월호 기억공간’은 서울시의회 앞으로 밀려났다. 그마저도 불법 시설물로 간주돼 언제 철거될지 모른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참사를 반복하지 말자는 사회적 약속과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선 추모공간은 반드시 필요하다”며 “하지만 참사 이후 이념 갈등이 반복되면서 추모공간 마련 논의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추모공간=기피시설’ 인식 바뀌어야

502명이 희생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희생자 위령탑은 사고 현장에서 6㎞ 떨어진 서울 양재동 '매헌시민의 숲' 안에 있다. 김재현 기자

502명이 희생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희생자 위령탑은 사고 현장에서 6㎞ 떨어진 서울 양재동 '매헌시민의 숲' 안에 있다. 김재현 기자

대형 참사 직후 추모공간 조성이 지지부진한 이유는 기피시설이란 사회적 인식과 맞닿아 있다. 지난해 10월 발생한 이태원 참사 현장에도 골목 벽 한쪽에 수십 장의 추모 메시지만 붙어 있다. 이태원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김모(57)씨는 “가뜩이나 영업 피해가 큰 데 추모시설을 여기다 지으면 장사하지 말란 얘기냐”며 “가슴 아픈 일이지만 당장 먹고사는 데 타격을 받기 때문에 추모공간이 달갑지 않다”고 말했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당시 동생을 잃은 김문수(61)씨는 “당시 현장에 추모비 하나라도 설치하길 원했지만 집값 하락 등을 우려하는 주민 반대에 부딪혀 흔적 하나 없이 사라졌다”며 “사고를 기억하고 안전의 중요성을 환기시킬 수 있는 추모비라도 있었다면 이태원 참사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추모공간을 대하는 미국과 영국 등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미국은 2001년 3,000명 이상이 사망한 9ㆍ11테러 이후 사고 현장에 연못과 공원 등으로 꾸민 대규모 추모공간(그라운드제로)을 만들어 희생자들을 기린다. 영국은 2005년 56명이 숨지고 700여 명이 부상을 입은 ‘런던 지하철 폭탄테러’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한 추모비를 런던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하이드파크에 조성했다. 사건 발생 7년 뒤 열린 런던올림픽 개막식에서 희생자 추모 시간도 가졌다.

전문가들은 추모공간 조성에 관(官)은 물론 일반 시민들의 공감대 형성도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추모공간은 희생자와 남은 사람들을 함께 기억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라며 “추모공간이 참사를 제대로 기억하고 치유하는 공간이 되도록 사회적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시 고위 관계자는 “항구적 추모공간을 마련할 수 있도록 관계부처와 논의하고, 가족들과 지속적으로 소통해 시민들도 참사를 기억할 수 있는 곳에 마련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9·11 테러로 무너진 미국 뉴욕 맨해튼 쌍둥이빌딩 자리에 조성된 추모시설 '그라운드제로'에서 추모객들이 헌화를 하고 있다. 뉴욕=AP 연합뉴스

9·11 테러로 무너진 미국 뉴욕 맨해튼 쌍둥이빌딩 자리에 조성된 추모시설 '그라운드제로'에서 추모객들이 헌화를 하고 있다. 뉴욕=AP 연합뉴스


김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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