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스코세이지·쿠엔틴 타란티노 즐겨 찾던 곳
22년 성업 후 2008년 폐업 지난해 다시 문 열어
"시칠리아섬서 지난해부터 '시네킴' 영화제 열려"
비디오ㆍ음반 대여판매점 ‘킴스비디오’는 한때 미국 뉴욕의 명물이었다. 1986년 뉴욕의 세탁소 한쪽 공간에서 개업한 후 지점이 10개에 이를 정도로 번창했다. 마틴 스코세이지와 쿠엔틴 타란티노 등 유명 영화감독들이 제집 드나들 듯 수시로 찾던 곳이다. 킴스비디오는 2008년을 마지막으로 사라졌다가 지난해 3월 새로 문을 열었다. 킴스비디오 설립자 김용만(65) 대표를 최근 전북 전주시 완산구 한 카페에서 만났다. 김 대표는 다큐멘터리영화 ‘킴스비디오’ 상영으로 제24회 전주국제영화제를 찾았다.
다큐멘터리는 킴스비디오 폐업 이후를 다룬다. 킴스비디오의 비디오ㆍDVD 5만5,000편가량은 우여곡절 끝에 이탈리아 시칠리아섬 작은 도시 살레미에 ‘정착’한다. 김 대표가 “넓은 공간에 전문가들이 관리하고 회원은 언제든지 이용할 수 있어야 하며 공공에도 개방해야 한다”는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었기 때문이다. 킴스비디오의 단골손님이었던 감독 데이비드 레드몬과 애슐리 세이빈이 비디오의 행방과 김 대표의 근황을 쫓는 내용이 다큐멘터리에 담겼다.
김 대표는 “폐업 직후 여러 감독으로부터 다큐멘터리 제작 제안을 많이 받았으나 모두 사양했었다”고 말했다. “분하고 억울하게 패했다는 생각이 들던 때”였기 때문이다. “저희 상대 중 하나가 DVD를 우편으로 직접 배달해주던 넷플릭스였는데 대적할 만하다 생각했어요. 하지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까지 하니 당해낼 수 없더군요.”
전성기 때는 킴스비디오 회원이 25만 명에 달했다. 직원은 300명 정도였다. 영화제 등을 다니며 영화 모으는 일만 하는 직원이 7, 8명이었다. 성공 비결은 희소성이었다. 그는 “책으로만 알고 실제 이용할 수 없는 영화들을 많이 모으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1979년 미국으로 이민 가 뉴욕 스쿨오브비주얼아츠(SVA) 등에서 영화제작과 영화역사를 공부하며 체득한 감은 적중했다. 영화학과 교수들이 희귀 영화를 보기 위해 킴스비디오를 찾았고 학생들 역시 애용했다. 영화 마니아와 감독 지망생, 유명 감독 등이 줄을 이었다.
‘브로크백 마운틴’(2005)과 ‘라이프 오브 파이’(2012)로 아카데미상 감독상을 2차례 수상한 대만 감독 리안(李安)도 데뷔 전부터 우수 고객이었다. 김 대표는 “리안과 공원에서 캐치볼하던 때가 어제 같다”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직원들 중에서 감독이 된 경우가 많기도 하다. ‘더 행오버’(2009)와 ‘조커’(2019) 등으로 유명한 토드 필립스가 대표적이다.
김 대표는 희귀 영화를 모으기 위해 ‘무단복제’를 하기도 했다. 그는 “여러 차례 소송을 당했고, 미연방수사국(FBI) 요원이 들이닥쳐 직원 10명가량이 수갑이 채워진 채 끌려간 적이 있기도 했다”고 돌아봤다. 김 대표는 “당시 동구권 영화나 언더그라운드 영화 등을 쉬 볼 수 없어 그랬던 것”이라며 “자신들의 영화가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해줘 고맙다고 한 감독들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레드몬ㆍ새이빈 감독의 주선으로 킴스비디오는 지난해 뉴욕 알라모 드래프트하우스 극장에 새 둥지를 마련했다. 시칠리아섬까지 갔던 비디오ㆍDVD가 돌아오기도 했다. 김 대표는 “현재는 2만5,000편가량을 이용할 수 있다”며 “35% 정도는 다른 플랫폼에서는 아예 볼 수 없는 영화들”이라고 전했다.
시칠리아섬과의 인연으로 살레미에는 그의 이름을 딴 영화제 ‘시네킴’이 지난해 생겼다. 김 대표는 영화제의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다. 영화제에서 그의 직함은 ‘정신적 인도자’다. “영화제 주제는 귀향이에요. 살레미는 (1968년) 지진 발생 후 퇴락한 곳이 됐습니다. 1유로에 집을 살 수 있도록 해주는 정책을 실시할 정도예요. 청년들이 영화제에 자극 받아 고향에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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