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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학, 세계를 비추는 거울에 대한 이해

입력
2023.04.29 04:30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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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 J. 옹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편집자주

어쩐지 펼쳐 보기 두려운 고전을 꺼내 보는 '다시 본다, 고전'이 두 번째 시즌을 엽니다. 한국상담대학원 대학교 교수이기도 한 진은영 시인과 20년 이상 출판 편집 기획자 생활을 거쳐온 강창래 작가가 <한국일보>에 격주 토요일마다 글을 씁니다.


고전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의 저자인 미국의 영문학자 월터 J. 옹의 생전 모습. 위키피디아 커먼스

고전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의 저자인 미국의 영문학자 월터 J. 옹의 생전 모습. 위키피디아 커먼스

인문학은 어떤 학문인가? 간단하게 답하기 어렵다. 필자는 위험을 무릅쓰고 단순화시켜 보겠다.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학문이다. 인간다운 삶을 살려면 알아야 하는 교양이다. 그렇다면 인문학은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 번째 질문은 ‘인간은 어떤 환경에서 살아가는가?’이다. 어린아이가 말을 배우면 주변의 사물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한다. 자신이 던져진 세상의 환경에 대해 알아야 적응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을 통해 구할 수 있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면서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세월이 지나면 아이는 자신이 타인과 다르다고 느낀다. 나는 왜 형제들과 다를까? 나는 왜 부모님(어른들)과 다를까?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다. ‘나는 어떤 존재인가?’ 이 질문을 확장하면 결국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에 이른다. 두 번째 질문이다. 그에 대한 답은 주로 문학과 철학에서 얻을 수 있다. 심리학과 생물학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다.

사색하는 사람. 게티이미지뱅크

사색하는 사람. 게티이미지뱅크

더 나이가 들면 또다시 새로울 뿐 아니라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하게 된다. 내가 알고 있는 것 모두가 옳지는 않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비슷한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이라 해도 자신과 완전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절망할 때도 있다. 도대체 왜 같은 것에 대해 그렇게나 다르게 해석하는 것일까?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같은 한국어를 쓰는데도 잘 통하지 않는다. 남자와 여자는 외국어가 아니라 외계어 수준으로 다른 언어를 쓴다. 현대인들은 말하기보다 쓰기와 읽기를 통해서 더 많이 소통한다. 그러면서 난감한 상태를 경험한다. 말로 생각한 것이 그대로 글로 옮겨지지 않고, 쓰여진 글도 의도한 대로 전달되지 않을 때가 많다. 입장과 맥락에 따라 다르게 쓰여질 뿐 아니라 다르게 읽히는 것이다. 그래서 세 번째 질문은 이렇다. '도대체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고 표현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주로 언어학에서 얻을 수 있다.

필자는 인문학 공부를 잘하고 싶다면 언어학으로 시작하기를 권한다. 언어는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다. 완벽한 평면도 아닐뿐더러 부분적으로 오목하거나 볼록한 거울이다. 그 거울에 대한 이해가 깊을수록 더 깊은 세상이 보인다.

언어학에서 고전의 반열에 올릴 수 있는 책을 꼽으라면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1916)와 현대철학의 고전이기도 한 자크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1967), 그리고 월터 J. 옹의 '구술문화와 문자문화'(1982) 정도일 것이다. 이 가운데 필자가 먼저 읽기를 권하는 책은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이다. 이 책은 출간 이후 학술적으로 인용된 횟수가 1만5,000회가 넘을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한국어판은 1995년 초판 이후 현재 3판에 이르렀고, 여전히 읽히고 있으며 앞으로도 읽힐 것이다. 같은 주제를 다룬 다른 책이 없을 뿐 아니라 이만큼 뛰어난 통찰력이 담긴 텍스트의 출현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책을 말 그대로 수십 번 읽었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내용을 보았기에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기원전 8세기에 쓰인 것으로 알려진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의 일부 페이지에 제우스에게 제물을 바치는 아킬레우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위키피디아 커먼스

기원전 8세기에 쓰인 것으로 알려진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의 일부 페이지에 제우스에게 제물을 바치는 아킬레우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위키피디아 커먼스

언어학을 접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앞에서 언급한 두 권의 책은 말할 것도 없고 이 책 역시 무척 낯설 것이다. 현대인이라면 ‘글자가 없는 세상’의 구술문화는 생각해 본 적도 없을 뿐 아니라 상상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아예 문자가 없는 사회에서 어떻게 문화를 만들 수 있었을까? 그 궁금증은 서구의 가장 오래된 고전 가운데 하나인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통해서 어느 정도 해소된다. 이 서사시는 문자로 기록되기 전 구술문화의 정수였다.

영화 '트로이'(트로이가 일리아스이다)를 본 다음 원작인 '일리아스'를 읽는다면 실망하기 쉽다. 끝까지 읽어내기도 어려울 것이다. 무엇보다 배경 설명이 없다. 서사시는 당시 상황을 잘 아는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것이어서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독자를 곧바로 사건 속으로 끌어들인다. 구술문화는 상황의존적이기 때문이다. 영화와 달리 스토리 전개도 지루하다. 말은 하는 순간 사라진다. 그러므로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 줄거리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앞에서 말한 것을 한 번 더 되풀이할 필요가 있다. 장황한 말투가 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쓸데없는 구절이 끝없이 되풀이된다. 예를 들어 ‘지모가 풍부한 오디세우스’가 72번이나 나온다. 다른 사람에게 속을 때도 ‘지모가 풍부한 오디세우스’이다. 아킬레우스는 언제나 ‘발 빠른 아킬레우스’인데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는 장면, 예를 들면 밥을 먹을 때도 ‘발 빠른 아킬레우스’이다.

'일리아스'는 1만5,693행이나 되고 '오디세이아'는 1만2,110행이나 된다. 이렇게 긴 서사시를 순전히 기억만으로 만든다고 상상해보라. 앞부분은 뒷부분이 만들어질 때쯤 잊어버릴 것이다. 그러지 않으려면 기억 가능한 방식을 개발해야 한다. 배경은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것으로 표준화하고 리듬이 깨지지 않도록 정형구를 되풀이해서 사용해야 한다. 그래서 ‘지모가 풍부한’이라는 말이 수없이 되풀이되었던 것이다. 그런 서사시를 만드는 시인들은 수많은 정형구를 암기하고 뻔한 스토리를 만들어내던 ‘조립라인의 노동자’였던 것이다.

유럽인들에게 이 작품은 자기네 조상들의 위대한 문화유산이었기 때문에 공평하게 평가하지 못했다. 20세기 초반이 되어서야 분석적으로 평가되었다. 그 이전에도 의심의 눈초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7세기 대수도원장이었던 프랑수아 에드랭은 이렇게 주장했다. "줄거리가 형편없고 등장인물의 성격 묘사도 빈약하며 윤리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 기피해야 할 작품으로, 나아가 호메로스라는 인물은 절대 실존하지 않았고 그의 작품으로 되어 있는 서사시는 다른 사람들의 시를 짜깁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구술성의 정신역학은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여기에 다 쓸 수도 없다. 그렇지만 그 성격을 이해하고 나면 구술성이 어떤 식으로 인간의 사고방식을 규정하는지 알게 된다. 대표적인 특징이 보수적이고 논쟁적이다. 문자문화의 영향을 받으면 그런 구술성도 변한다.

언어학의 고전으로 꼽히는 '일반언어학 강의'(1916)의 저자 소쉬르. 위키피디아 커먼스

언어학의 고전으로 꼽히는 '일반언어학 강의'(1916)의 저자 소쉬르. 위키피디아 커먼스

문자문화는 소쉬르가 생각했듯이 구술문화의 보조수단이 아니었던 것이다. 데리다는 대리보충이라는 개념으로 그 차이를 설명한다. 무척이나 재미있지만 여기에서는 다루지 못한다. 말과 글은 아주 다른 것이다. 말은 비디오 상황에서 청각을 자극하며 생각을 전달한다. 그때 말하는 사람의 의도가 말에 담기는 비율은 아주 적다. 목소리 크기와 어조, 표정, 몸짓, 때와 장소가 모두 더해져서 하나의 ‘의미’가 된다. 그렇지만 글은 오로지 글만으로 의미를 담아 전달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상황과 맥락에 대한 정보가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 빈 공간은 독자가 미루어 짐작해서 채워야 한다. 같은 텍스트라고 해도 독자에 따라 해석이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말은 발신자와 수신자가 분명하다. 그렇지만 글은 발신자에게서 분리된다. 설사 수신자가 분명하다고 해도 다른 수신자가 읽을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수신자의 상황에 따라 발신자의 의도는 다른 의미로 읽히기도 한다. 맥락이 달라지면 같은 텍스트에 대한 해석도 달라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글쓰기는 말하기와 달리 끊임없이 반성할 기회를 제공한다. 고칠수록 세련되고 객관적이 될 가능성이 커진다. 또 긴 생각을 검토하면서 정리할 수 있다. 끊임없이 되풀이해서 참조할 수 있는 대량의 데이터로 축적할 수도 있다. 쓰기는 그런 과정을 통해 구술적인 사고방식을 재조직한다.

이처럼 말은 말의 논리가 있고, 글은 글의 논리가 있다.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에는 이런 내용만큼이나 인간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이 문장 곳곳에 스며 있다. 꼼꼼히 새기며 읽어야 할 이유다. 더구나 문자문화가 발달한 이후에 구술문화가 사라진 것도 아니고 사라질 수도 없다. 이 책 후반에는 인쇄문화가 발달한 이후에 변화된 구술문화에 대해서도 다룬다. 현대철학이 이런 문자문화와 얼마나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지도 알 수 있다.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는 이 책을 아주 잘 이해한 다음에야 어느 정도 독해가 가능하다.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월터 J. 옹 지음·임명진 옮김·문예출판사 발행·352쪽·1만7,000원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월터 J. 옹 지음·임명진 옮김·문예출판사 발행·352쪽·1만7,000원


강창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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