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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아’ 없는 세상

입력
2023.04.12 16:00
수정
2023.04.12 17:1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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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쿨존서 음주운전에 사망한 배승아양
예방 노력 다하지 않은 어른들의 책임

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11일 오전 대전 서구 을지대병원 장례식장에서 대전 어린이보호구역 음주운전 사고로 세상을 떠난 배승아(9)양의 발인식이 엄수되고 있다. 뉴스1

11일 오전 대전 서구 을지대병원 장례식장에서 대전 어린이보호구역 음주운전 사고로 세상을 떠난 배승아(9)양의 발인식이 엄수되고 있다. 뉴스1

폐쇄회로(CC)TV 영상을 보면, ‘음주 차량’은 자로 잰 듯 아이들이 걷고 있는 딱 그곳으로 돌진한다. 어린이보호구역 인도에는 아이들 앞쪽에도, 뒤쪽에도 행인이 없었는데 말이다. “5초만 일찍, 혹은 늦게 그곳을 지나갔다면···” 하는 부질없는 생각도 든다. 지난 8일 오후 2시 21분쯤, 대전 서구 둔산동 탄방중학교 인도에서 배승아(9)양이 치인 순간이다. 머리를 다친 승아양은 11시간 후 세상을 떠났다.

□ 사고 현장엔 10대들이 써 놓은 것으로 보이는 편지들이 즐비하다. “언니들이 꼭! 음주운전 없는 세상 만들게!!” “오빠가 노력해서 성공해서 이런 일이 없도록 할게!” “음주운전을 한 사람을 15년 뒤에 꼭 처벌해 줄게.” “언니들이 사고 없는 예쁜 세상 만들게. 위에서 잘 지켜봐 줘.” 이 문구들엔 ‘지금 어른들은 믿을 수 없으니까’라는 말이 전제돼 있다. 세월호, 이태원 참사 등을 보고 자란 아이들이 어른을 믿을 수 없는 건 당연하다.

□ 실제로 어른들은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하지 않고 있다. 승아양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던 안전 펜스는 스쿨존 인도에 없었다. 민식이법(개정 도로교통법 12조)에 따르면, 시장 등은 어린이보호구역에 방호 울타리 등을 설치하거나 설치를 요청해야 하는데 말이다. 여러 국가들이 음주운전 전력자의 차량에 ‘음주운전 시동잠금장치’를 설치하도록 하지만, 한국엔 도입되지 않았다. 재범 음주운전자에 의한 사망자 비율은 늘어나는 상황이다.

□ 음주운전 사망자는 2020년 287명, 2021년 206명이었다. 2000년 1,217명, 2010년 781명에 이르던 ‘야만의 시대’와 비교하면 크게 줄어든 것은 맞다. 그러나 누가 200명의 목숨이 적다고 할 수 있나. 단 한 명이라도, 그를 보호하지 못했다면 바다처럼 눈물을 흘려야 한다. 승아가 세상을 떠난 후 분노로 들끓던 사회는 점차 누그러지고 있다. 하지만 딸의 죽음에 면역력을 가질 수 없는 엄마는 오늘도, 내일도 ‘승아 없는 세상’에서 아픈 눈을 뜰 것이다.

배승아(9)양의 어머니와 오빠가 11일 오후 대전 추모공원에서 배양의 유골함 봉안을 마친 뒤 인터뷰를 하다가 어머니가 오열하고 있다. 어머니는 승아의 애착인형을 안고 있다. 연합뉴스

배승아(9)양의 어머니와 오빠가 11일 오후 대전 추모공원에서 배양의 유골함 봉안을 마친 뒤 인터뷰를 하다가 어머니가 오열하고 있다. 어머니는 승아의 애착인형을 안고 있다. 연합뉴스


이진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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