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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곡관리법 ‘네 탓 싸움’

입력
2023.03.24 18:0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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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정황근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23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국회 본회의에서 양곡관리법 일부 개정법률안에 대한 수정안이 가결된 것에 대해 법률안 재의 요구안을 제안한다는 입장 표명 후 연단을 내려오고 있다. 뉴시스

정황근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23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국회 본회의에서 양곡관리법 일부 개정법률안에 대한 수정안이 가결된 것에 대해 법률안 재의 요구안을 제안한다는 입장 표명 후 연단을 내려오고 있다. 뉴시스

‘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다’고 했다. 구한말 흑백사진 속 서민용 밥그릇의 어마어마한 크기만 봐도 우리네 전통 끼니에서 차지한 밥의 위상이 짐작된다. 밥과 국이 사실상 식사의 전부였을 정도이니, 밥의 재료인 전체 알곡 중에서도 쌀은 늘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역사상 마침내 쌀의 자급을 이룬 건 1976년이 처음이었다.

▦ 6ㆍ25 전쟁 후 베이비붐이 이어지면서 인구는 매년 3%씩 급증하는데, 쌀 생산량은 그만큼 늘지 못했다. 쌀막걸리 제조가 금지됐고, 심지어 쌀을 못 먹는 ‘무미일’까지 법으로 지정돼 국수를 먹기도 했다. ‘통일벼’가 개발ㆍ보급돼 1976년 자급 달성에 이어, 1977년 쌀 수확 4,000만 석을 돌파하자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농촌진흥청에 ‘녹색혁명 성취’라는 휘호로 감격의 마음을 남기기도 했다.

▦ 그때 이후 쌀 생산량은 대체로 수요를 초과해왔다. 그럼에도 쌀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식량으로서 위상이 여전했다. 1994년 우루과이라운드(UR)에서 쌀 수입이 허용되자, 식량안보를 포기했다며 전국적인 반대투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쌀 증산이 꾸준한 가운데 인구 증가세는 둔화하고, 국민 식단에도 부식이 풍부해지면서 1인당 연간 쌀 수요량도 1970년대 120㎏에서 지난해 56.7㎏으로 절반 이상 줄었다. 그 결과 매년 평균 30만 톤 이상이 과잉 생산됐다.

▦ 이젠 쌀 감산과 여타 식량의 증산, 농업혁신 추진이 절실해졌다. 그럼에도 최근 거대야당은 민생과 식량주권 확보를 내세워 쌀 초과 생산량이 3~5%이거나 쌀값이 전년 대비 5~8% 하락할 때, 정부가 초과 생산량 전량을 의무 매입하도록 하는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강행 처리했다. 반면 그동안 여ㆍ야 협의조차 피해온 정부ㆍ여당은 “농업을 망칠 포퓰리즘”이라며 대통령 거부권을 행사할 태세다. 그 경우 야당은 거센 반정부 투쟁에 나설 게 뻔하고, 정부ㆍ여당은 거꾸로 야당의 입법폭주와 무모함을 부각한다는 계산이니, 일이 결국 정치권의 ‘네 탓 싸움’에 휘말리는 게 개탄스럽다.

장인철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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