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공수여단 김귀삼씨 눈물 증언
계엄군, 광주역·광주교도소 주둔
"매장한 시체 흔적 없이 사라져"
화해 강행에 5월 단체들은 내홍
5·18민주화운동 당시 진압작전에 투입됐던 계엄군이 40여 년 만에 양심고백을 하고 용서를 구했다.
5·18부상자회와 공로자회는 14일 광주광역시 서구 5·18기념문화센터에서 '오늘의 증언이 5·18 진상규명의 첫걸음이다'를 주제로 증언 행사를 열었다. 이날 행사에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제3공수여단 소속 중사 신분으로 진압 작전에 투입된 김귀삼(68)씨가 증언자로 나섰다.
광주 출신 김씨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으로 고향에 돌아왔다. 김씨는 광주역에 주둔하면서 시민을 향해 발포하진 않았지만, 총상을 입은 시체를 수습했다고 증언했다. 김씨는 “부대원 200여 명이 광주역 광장에서 시민군과 맞닥뜨려 전우가 목숨을 잃었고, 시민군도 운전사 1명이 목숨을 잃었다”며 “우리 부대는 실탄이 없었지만, 이후 시신과 포로들을 광주교도소로 후송하는 과정에서 인중에 총알을 맞은 시신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그는 포로로 잡혀온 시민 1명의 대퇴부를 대검의 무딘 부분으로 찔렀던 사실도 전하며 "그분이 아직 살아계시는지 모르겠지만 사죄하고 싶다"며 눈물을 흘렸다.
김씨는 5‧18민주화운동 직후 계엄군에 의해 ‘사체 처리반’이 활동했을 가능성도 털어놓았다. 김씨는 “당시 시신을 광주교도소 인근에 매장했는데 1981년 보안사령부 관계자가 어느 지역에 사망자를 매장했는지 조사했다”며 “이후 매장했던 시신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김씨는 이후 옛 광주교도소로 배치됐다고 했다. 그는 "이때 처음으로 실탄이 지급됐고, 실탄을 줬기 때문에 발포 명령과 똑같은 것"이라며 "실제 경계 근무 중 접근하는 트럭의 바퀴를 향해 총을 쐈다"고 발포 사실도 털어놨다.
이날 행사는 옛 광주교도소에서 총상을 입은 5·18 부상자 김태수씨도 함께 참석해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당시 광주교도소 앞을 지나던 버스에 탑승했던 김태수씨는 계엄군이 난사한 총알에 의해 부상을 입었다. 김태수씨는 "살아오면서 3공수여단 출신 군인은 사람이 아니고 짐승이라고 생각했다"며 "그런데 지금 와서 계엄군이었던 당사자를 만나 보니까 용서가 된다"고 말했다.
증언 행사를 마친 김귀삼씨는 5·18 단체 회원들과 함께 광주역과 옛 광주교도소를 방문해 보충 설명한 뒤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참배했다.
이날 행사는 계엄군과의 화해 강행에 반발하는 다른 5월 단체들로부터 외면을 받았다. 제43주년 5·18민중항쟁기념행사위원회는 이날 증언 행사를 주관한 5·18부상자회와 공로자회를 제명하기로 결정했다. 행사위의 제재 방안 논의에 반발해온 두 단체는 이미 행사위를 탈퇴한 상태다. 행사위는 시민사회가 주도하는 전야제와 기념행사를 기획·실행하는 민간기구다.
양재혁 5‧18민주유공자유족회장은 “5월 단체 간 갈등의 골이 극한으로 치닫고 있어 매우 안타깝다”며 “43주년 행사가 차질을 빚지 않도록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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