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로 무기 재수출 허용을" 서방 압박에도
스위스, '군사적 중립' 원칙 강하게 고수 중
"무기 수출하면서 '좋은 사람'이고 싶어해"
#. "스위스가 중립을 포기했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가한 유럽연합(EU)의 제재에 '중립국' 스위스가 지난해 동참 뜻을 밝혔을 때 이 같은 반응이 나왔다. 당시 스위스는 "국제법을 위반한 범죄 앞에 중립은 없다"는 논리를 폈지만, 실질적으로는 서방에 기울었다는 게 중론이었다.
#. 스위스는 다시 태도를 바꿔 중립국임을 앞세우고 있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을 차단하면서다. 스위스 군수기업 외를리콘-뷔를레는 독일이 우크라이나에 보낸 자주대공포 게파르트의 탄약을 생산하는 유일한 회사다. 스위스는 독일이 게파르트 탄약을 우크라이나로 보내는 것을 끝내 불허했다.
갈수록 양극화하는 냉혹한 국제 질서 속에서 스위스가 처한 딜레마의 단면이다. 수세기에 걸친 스위스의 중립 전통이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시험대에 올랐다고 미국 뉴욕타임스(NYT)가 12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중립이라서…' 스위스, 우크라로 무기 재수출 금지
최대 쟁점은 스위스가 생산하는 무기의 우크라이나 지원 허용 여부다. 국제법과 스위스 헌법이 보장하는 중립국 원칙에 따라 스위스는 전쟁 당사자인 우크라이나에 직접 무기를 보낼 수 없다. 우크라이나로의 재수출도 금지한다. 예컨대 독일은 스위스의 탄약을 구매할 때 제3국에 인도하지 않겠다고 서명해야 한다. 전쟁 중인 두 나라 간 군사적 힘의 균형에 영향을 미치는 건 '중립'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백한 침략전쟁 앞에서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으려는 것'이 과연 중립이냐는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 지금껏 스위스가 늘 절대적 중립을 지켜온 것도 아니었다. 유엔 회원국으로서 스위스는 모든 유엔 제재에 동참했다. 다만 EU 제재에 대해선 '선택적'으로 참여했다.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합병할 때 스위스는 EU 제재에 함께하지 않았다.
전쟁이 예상보다 길어지면서 무기 재수출 규제를 풀어달라는 압박 수위가 높아지는 것은 스위스를 당혹하게 한다. 무기 수출과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주저하는 것에 대한 서방의 시선은 곱지 않다. 익명을 요구한 서방 고위 관리는 "서방 외교관들 입장에서 볼 때 스위스는 '경제적 이익의 중립'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NYT에 말했다.
중립국 전통에 90% 이상 압도적 지지를 보내고 있는 스위스 국민들은 '평화 중재자'를 자처하지만, 국제사회는 스위스의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수십 년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혜택을 받은 스위스가 서방의 연대를 방해한다는 비판까지 나온다.
"'중립' 재정의할 때" 목소리 커진다
스위스 국영방송 SRF는 전쟁의 틈을 타 중립을 재정의해야 한다는 국내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중립을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하려는 움직임이다. 중도우파 자유민주당의 티에리 부르카르트 대표는 "중립을 원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서방 세계의 일부"라며 우크라이나 편에 섰다.
중립을 옹호하는 우파 스위스국민당(SVP) 내에서도 무기 재수출을 허용하자는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현실적으로 계산기를 두드려본 결과다. 베르너 잘츠만 SVP 의원은 "스위스 방위 산업은 수출에 의존하고 있으며, 수출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 NYT에 말했다. 스위스 고용주 협회 스위스멤의 군사 전문가인 마티아스 졸러는 "수출 시장이 사라지면 스위스 군수 산업 종말이 시작되는 것"이라고 SRF에 말했다.
경고등은 이미 켜졌다. 유럽 각국의 군수 업체들이 스위스에서 핵심 부품을 생산하는 것을 꺼리기 시작했다고 NYT는 전했다. 유럽 최대 방산업체 중 하나인 독일 라인메탈은 탄약을 자체 생산할 계획이다.
이에 스위스 상·하원 안보정책위원회는 해외에 수출된 무기에 한해 예외적으로 재수출을 허용하자는 타협안을 내놓았다. 사실상 우크라이나 지원을 염두에 둔 것이다. 하지만 지난 10일 연방정부는 거듭 거부했다.
국제법 전문가인 올리버 디겔만 취리히대 교수는 "스위스는 무기 수출을 하면서도 그 무기에 대한 통제권을 주장하고 싶어 한다"며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을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에 스위스가 비틀거리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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