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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성 없는 정치

입력
2023.03.03 15:18
수정
2023.03.03 20:59
22면
0 0

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이항복(왼쪽)과 이덕형 초상. 서울대학교 박물관, 한국역사문화원

이항복(왼쪽)과 이덕형 초상. 서울대학교 박물관, 한국역사문화원

백사(白沙) 이항복은 왜란 극복에 공헌한, 조선 선조 때 명신이다. 조선 후기에는 씩씩하고 정의로운 소년 듀오 ‘오성(이항복)과 한음(이덕형)’ 설화의 주인공으로, 때로는 포용력으로 백성을 도운 어르신의 상징으로 남았다. ‘노련충(盧連虫) 소동’은 야사로 전해지는 인생 말년 백사의 미담이다.

□백사가 관북지방으로 귀양을 갔다. 지방 향교의 젊은 유생이 극진히 돌봤다. 서울에서 시험관이 향교 유생들을 점검하러 왔다. 낙방하면 군대를 가야 했다. 시험관이 기러기 ‘안’(雁)자를 보여주고 뜻을 물었다. 우물쭈물하는 유생을 보고, 주위 누군가 “어이구, 저 노련충(멍청이의 관북지방 은어)!"이라고 낮게 한탄했다. 답을 알려준 걸로 착각한 유생이 “노련충”이라고 말하자, 시험관은 낙방 처리했다. 그날 저녁 유생이 찾아와 매달리자, 백사는 기러기를 시험관 숙소에 묶어 놓으라고 했다. 다음날 ‘꺽꺽’ 울어대는 기러기에 놀란 시험관에게 이항복은 “노련충이 시끄럽다”고 말했다. 시험관은 징집을 중단시켰다.

□이 사연은 관점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해석된다. 조선 후기에는 연관검색어가 #재치 #은혜 갚은 이항복인 미담이었겠지만, 21세기에는 사회지도층이 측근을 병역의무에서 면탈시킨 범죄일 수 있다. 일상에서 개인과 집단 이익의 상충은 빈발한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의 남북 단일팀 구성 논란 등이 대표 사례인데, 이런 논란에는 정답이 없다. 비슷한 상황에서 똑같이 대응했는데, 흥망과 성패가 엇갈리는 경우도 있다.

□물론 경향성은 확인된다. 보편적 인권에 바탕을 두면서도, 다양성과 백가쟁명 논의를 인정할수록 선진국이다. 1970년대 한국에선 총력안보, 총화단결이 강조됐지만, 10년 전 세계은행이 ‘한국은 중진국 함정에서 벗어났다’고 선언한 건 우리의 다양성 때문이었다. ‘총·균·쇠’의 제러드 다이아몬드 역시 근대 중국이 유럽에 밀린 원인을 다양성 부족에서 찾는다. 한국 정치가 ‘경쟁력 취약 지대’로 꼽히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정파 간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어쩌다 주도권을 쥔 주류가 비주류를 밟는 악습이 여야 모두 여전하다. ‘다르다’와 ‘틀리다’는, 서로 비슷한 말조차 될 수 없는데도 그렇다.

조철환 오피니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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