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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와 소녀는 그렇게 친구가 되었다

입력
2023.03.02 11:00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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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루타니 가오리 '툇마루에서 모든 게 달라졌다'

편집자주

차별과 갈등을 넘어 존중과 공존을 말하는 시대가 됐지만, 실천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모색한다, 공존’은 다름에 대한 격려의 길잡이가 돼 줄 책을 소개합니다. 허윤 부경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한국일보>에 4주마다 금요일에 글을 씁니다.


'툇마루에서 모든 게 달라졌다'의 주인공인 75세의 유키와 여고생 우라라는 BL(Boy's Love·남성 동성애를 다룬 장르)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으로 친해진다. 미래엔 제공

'툇마루에서 모든 게 달라졌다'의 주인공인 75세의 유키와 여고생 우라라는 BL(Boy's Love·남성 동성애를 다룬 장르)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으로 친해진다. 미래엔 제공

그동안 여성 서사의 핵심은 사랑이었다. 주인공이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행복을 찾는 데서 재미를 찾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여성들의 일, 삶 등 다양한 영역을 조망하는 작품이 늘어나고 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여성들의 우정이다.

쓰루타니 가오리의 만화 '툇마루에서 모든 게 달라졌다'는 여성들의 관계에 주목한 작품이다. 여고생 우라라와 75세의 할머니 유키는 BL(Boy's Love·남성 동성애를 다룬 장르)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으로 친해진다. BL은 높은 인기에 비해 ‘비정상적인’ 사랑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 ‘음지’에 속하는 장르다. 때로는 현실의 퀴어에 대해서는 모르면서 콘텐츠 속 사랑을 즐긴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래서 순정만화를 좋아한다고는 말할 수 있지만, BL을 읽는다고 고백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우라라는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BL과 관련된 창작만화를 그릴 만큼 열정적인 독자지만, 주변 사람들에게는 BL을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한다. 그런 우라라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서점에 유키가 나타나 만화책을 사면서, 이 둘의 우정이 시작된다.


유키와 우라라는 툇마루에 앉아 같이 읽은 책에 대해 얘기를 나눈다. 미래엔 제공

유키와 우라라는 툇마루에 앉아 같이 읽은 책에 대해 얘기를 나눈다. 미래엔 제공

남편이 죽은 뒤 무미건조한 일상을 살아가던 유키는 오랜만에 방문한 서점에서 젊은 시절을 떠올리며 아름다운 소년의 얼굴이 그려진 표지의 순정만화를 산다. 당황하는 점원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유키는 집에 돌아와서야 그 책이 BL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책을 다 읽은 후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져 서점으로 달려갈 만큼 빠져들게 된다. BL은 젊은 여성들을 위한 장르라는 '편견'에도 불구하고 유키는 주인공들의 사랑에 공감하고 그들이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빈다. 동성애에 대해 생각해본 적 없던 유키지만, BL이라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편견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후 유키는 우라라에게 다른 만화를 추천받기도 하고, BL 잡지를 예약하고, 동인지 판매장에 가서 몇 시간씩 줄을 선다. 75세가 될 때까지 몰랐던 세계에 용감하게 발을 내디딘 것이다. 자신이 BL을 좋아한다는 것을 숨기는 우라라와 달리 유키는 망설이지 않는다. 우라라가 직접 만든 동인지를 판매할 수 있도록 격려하며 한발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다. 둘은 그렇게 가족에게도 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공유하는 친구가 된다. 사는 곳도, 나이도, 살아온 시간도 전혀 다른 두 여성이 서로를 응원하며 정서적으로 지지하게 된다.


툇마루에서 모든 게 달라졌다 전5권·쓰루타니 가오리 지음·현승희 옮김·북폴리오 발행·총 772쪽·5만1,800원

툇마루에서 모든 게 달라졌다 전5권·쓰루타니 가오리 지음·현승희 옮김·북폴리오 발행·총 772쪽·5만1,800원

만화는 두 여성의 관계를 따듯하게 지켜본다. 하나뿐인 딸이 해외에 사는 유키와 친구가 없는 우라라는 고립된 채 혼자 살아가는 여성들이다. 유키의 집 툇마루에 앉아서 좋아하는 만화, 하고 싶은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우라라는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해 보인다. 둘은 함께 그동안 망설이며 하지 못했던 일을 시도할 수 있는 용기를 쌓아간다. 그래서 이 만화는 두 여성의 성장 만화이기도 하다. 독자들은 유키와 우라라를 보며 내게도 그런 친구가 생기기를 소망한다. 성장한 두 사람이 툇마루를 떠나는 장면을 오래도록 곱씹는다.


허윤 부경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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