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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공식 사과 안 했지만… 법원은 베트남전 한국군 학살 책임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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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공식 사과 안 했지만… 법원은 베트남전 한국군 학살 책임 인정

입력
2023.02.08 04:30
3면
0 0

법원, 베트남전 학살 책임 첫 인정
재판장 "사살은 명백한 불법행위"
"원고 적격 없다" 주장 모두 배척
줄소송 여부 관심사... "노코멘트"
베트남 입장 따라 외교 이슈 가능성

1968년 베트남전 당시. 한국일보 자료사진

1968년 베트남전 당시. 한국일보 자료사진

"제가 말한 게 모두 진실이라고 인정해준 재판부에게 감사합니다."

1968년 한국군 총격으로 가족을 잃었던 8세 소녀가 반세기가 흘러 한국 법정으로 소환됐다. 한국 법원이 7일 비무장 민간인 학살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면서, 소송을 제기한 응우옌티탄(63)씨는 마침내 웃음을 되찾았다.

베트남전 학살 공식 사과 없었던 정부

응우옌씨는 1968년 2월 베트남 꽝남성 퐁니마을 집 주변에서 한국군 청룡부대(해병 제2여단) 소속 군인들이 쏜 총에 왼쪽 옆구리를 맞아 중상을 입었다. 가족 5명은 목숨을 잃었고, 14세 오빠는 중상을 입었다.

응우옌씨도 수술로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지금까지 후유증을 겪고 있다. 그는 민간인 74명이 목숨을 잃은 '퐁니·퐁넛 학살사건'의 피해자였다. 2000년 제주 인권학술회의 자료에 따르면 한국군은 1964년 9월부터 1972년까지 31만2,000여 명을 베트남에 파병했으며, 이 기간 한국군에게 학살된 베트남 민간인은 9,000여 명에 달했다.

정부는 기회 있을 때마다 "양국 간의 불행한 역사에 대해 유감의 뜻을 전한다"며 사과했지만 "공식 사과는 아니다"라는 단서를 붙였다. 퐁니마을 사건 피해자 103명이 2019년 4월 청와대에 낸 '학살을 인정해달라'는 청원서 역시 "한국군 개입이 입증되지 않았다"고 외면했다.

"한국군 학살" vs "단정할 수 없어"

법원이 한국 정부의 베트남전 배상책임이 있다는 원고 승소 판결을 내린 7일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베트남 현지의 응우옌티탄씨가 화상통화를 하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홍인기 기자

법원이 한국 정부의 베트남전 배상책임이 있다는 원고 승소 판결을 내린 7일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베트남 현지의 응우옌티탄씨가 화상통화를 하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홍인기 기자

응우옌씨는 2020년 4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과 함께 한국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응우옌씨는 미군의 감찰 보고서, 남베트남군의 관련 보고서, 참전 군인 진술 등을 근거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참전 군인과 목격자들도 '한국군의 민간인 살해 장면을 봤다'고 진술했다. 한 참전 군인은 "소대원들이 중대장에게 민간인들을 어떻게 할지 물어봤는데, 중대장이 엄지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고 전했다. 응우옌씨 역시 직접 법정에 출석해 "한국군이 수류탄으로 위협했고, 벌벌 떨던 가족들이 나가자마자 총격을 가했다"고 진술했다.

정부는 한국군으로 위장한 다른 세력의 범행 가능성을 내세웠다. 한국 군복을 입고 있었고, 베트남어를 쓰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학살 군인을 한국군으로 단정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손해배상 청구권 소멸시효가 지났다며 맞서기도 했다.

"민간인 사살은 명백한 불법행위"

서울중앙지법 민사68단독 박진수 부장판사는 그러나 "(한국군의) 명백한 불법행위"라고 결론 내렸다. 한국군이 응우옌씨 가족과 민간인들을 사살한 사실도 인정했다. 박 부장판사는 "응우옌씨 가족들이 방공호 밖으로 나오자마자 (한국군이) 총격을 가했다"고 밝혔다. 집 밖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된 응우옌씨 어머니에 대해선 "그녀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강제로 모이게 한 뒤 총으로 사살했다"고 했다.

정부의 손해배상 청구권 소멸시효 도과 주장에 대해서도 "(한국 정부의) 권리 남용"이라고 못 박았다. 응우옌씨가 소송 제기 전까지 청구권을 행사하지 못할 장애가 있었다는 것이다. 응우옌씨 법률대리를 맡은 이선경 변호사는 "군의 민간인 살상으로 보편적 인권침해가 있었다면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는 게 판결의 의미"라고 평가했다.

유사 소송 이어질지 관심사

제주4·3평화상 특별상을 수상한 응우옌티탄(퐁니·퐁넛 마을)씨. 그 스스로가 '퐁니·퐁넛 마을 학살 사건'의 피해자인 응우옌티탄씨는 지난 2015년부터 베트남 전쟁 당시 자행된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사건을 공론화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제주4·3평화상 특별상을 수상한 응우옌티탄(퐁니·퐁넛 마을)씨. 그 스스로가 '퐁니·퐁넛 마을 학살 사건'의 피해자인 응우옌티탄씨는 지난 2015년부터 베트남 전쟁 당시 자행된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사건을 공론화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날 한국군의 학살 책임을 인정한 판결이 처음으로 나오면서 비슷한 피해를 본 베트남인들의 줄소송 가능성도 커졌다. 다만 응우옌씨 측 임재성 변호사는 추가 소송 가능성에 대해 "답변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소송 의사를 밝힌 피해자들을 확인하지 못했다는 이유에서다.

임 변호사는 "이번 소송에 대해 베트남 정부의 코멘트가 나오는지가 핵심일 것 같다"고 밝혔다. 이번 판결이 양국 간 외교적 이슈로 떠오를 수도 있다는 얘기다.


박준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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