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분리 관습, 공식행사 부부동반 안 해”
“왕족 여성 서열 1위, 여성 별도 접견 관례”
“‘UAE의 국모’, 상징성·정치적 영향력 막강”
지난 14~17일(현지시간) 아랍에미리트(UAE)를 국빈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의 부인 김건희 여사가 무함마드 빈 자이드 알 나흐얀 UAE 대통령의 모친 셰이카 파티마 빈트 무바라크 알 케트비 여사를 15일 접견했다. 통상 정상회담이라면 양국 정상 내외가 환영식 등 공식행사에서 만나고, 필요할 경우 영부인끼리 추가 모임을 하는 게 관례다. 하지만 김 여사는 공식행사에서 UAE 대통령의 부인을 만나지 못했으며, 모친 접견을 요청해 비공개 만찬을 했다. 왜 그랬을까.
중동 전문가들은 남녀의 공간을 엄격히 분리해 모임을 하는 이슬람 문화의 특성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중동 국가는 ‘일부다처제’이기 때문에 다수인 무함마드 대통령 부인들을 공식행사에 줄 세우기 애매했을 것이란 추측을 했다면, 이는 단견이란 해석이다.
UAE처럼 공화정 형태이지만 실질은 왕정인 국가를 포함해 중동의 이슬람 왕정 국가에서 왕족 가운데 여성은 통상 공식행사장인 왕궁이나 대통령궁이 아닌 별도의 궁에서 지낸다. 왕과 부부동반 모임도 생략한다. 해당 국가를 방문한 영부인이 이들을 만나려면 별도 약속을 잡고 따로 만나는 수밖에 없는 셈이다.
엄익란 단국대 자유교양대 교수는 “중동의 왕족은 부인이 나서서 대외활동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며 “이슬람 관습에 따라 부부가 함께 있어도 여성이 낯선 남자와 함께 있는 것을 꺼리기 때문에 남녀가 공간을 분리해 각각의 사랑방에서 모이는 게 그들의 문화”라고 말했다.
코란, "그녀들의 시선을 낮추고..." 하디스, "천국은 어머니의 발 밑에..."
이는 이슬람 율법에 연원이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슬람 경전인 코란엔 “믿는 여성들에게 말하라! 그녀들의 시선을 낮추고…”란 구절이 있다. 코란은 남녀가 낯선 이성을 마주했을 때 서로 시선을 피하도록 가르친다. 장 후세인 재단법인 한국이슬람교 선교 차장은 “코란은 남녀 모두 정숙해야 하고, (낯선 이성을 대할 때) 시선을 낮춰 불필요한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도록 가르친다”며 “때문에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편하게 모임을 하는 게 일반적”이라고 말했다.
또 왕족 사회의 여성 서열 1위는 왕비가 아니라 모후다. 때문에 모후가 살아있는 경우 이슬람 왕족 국가를 방문한 국가 정상의 부인은 왕비가 아닌, 모후를 찾는 게 오히려 자연스럽다는 설명이다. 이는 하디스(이슬람교 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록)에도 연원이 있다. 하디스엔 ‘천국은 어머니의 발 밑에 있느니라’란 구절이 있다. 후세인 차장은 이 구절을 “어머니를 존경하고 효도하면 바로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뜻”이라고 풀이했다.
한국 대통령 내외가 UAE를 방문했을 때 영부인이 UAE 정상의 부인을 찾지 않고, 파티마 여사를 찾아 접견한 것은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부인 김정숙 여사가 지난 2018년 3월 UAE를 방문했을 때도 파티마 여사 주최로 오찬을 했으며, 당시 40명의 왕실 며느리 등이 참여했다.
초대 대통령 내조, 현 대통령·만수르 키워... 여성교육 강화 공헌도
UAE의 ‘국모’로 추앙받는 파티마 여사의 상징성과 정치적 영향력도 한국 측이 접견을 추진한 요인으로 풀이된다. 파티마 여사는 1971년 영국 보호령에서 독립해 아랍 7개 부족의 연합국가로 탄생한 UAE의 '국부'로 불리는 고(故) 셰이크 자이드 빈 술탄 알 나흐얀 초대 대통령의 부인이다. 그는 무함마드 대통령과 ‘부호’로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셰이크 만수르 빈 자이드 알 나흐얀 부총리 겸 대통령실 장관 등 자녀를 훌륭하게 키웠고, UAE의 여성 교육 강화에도 힘썼다. 자국민들로부터 존경받는 이유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는 “파티마 여사는 UAE를 건국한 자이드 전 대통령을 내조하면서 국모 역할을 했고, 무함마드 대통령과 만수르 부총리의 어머니로 UAE 여성을 대표하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며 “왕실 내 화해와 균형의 중심으로 상징성도 강한 분”이라고 말했다.
"서구 정상은 중동 방문 때 영부인 동반 안 해", 바이든·시진핑도…
이 때문에 UAE와의 외교에서 파티마 여사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려 한 것은 적절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김정명 명지대 아랍지역학과 교수는 “UAE가 있는 걸프 지역은 중동 지역 가운데서도 이슬람 원리주의인 ‘와하비즘’이 유독 강한 곳이기 때문에 외국인이 인구의 80%가량을 차지함에도, 왕족은 더 폐쇄성을 유지하며 차별성을 강조하려는 경향이 강하다”며 “하지만 여성의 역할이나 영향력이 왕실 내부에서는 상당하기 때문에, 외교를 통한 여성 간의 인맥 형성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공식 행사에 정상의 부인을 동반하지 않는 중동 국가를 방문할 때는 영부인을 동반하지 않는 게 상대방을 배려하는 정상외교 방식이란 견해도 있다. 황병하 조선대 아랍어과 교수는 “아랍 국가는 통상 정상외교 공식행사에 부인을 동반하지 않기 때문에 서구 정상들도 이에 맞춰 영부인을 동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아랍의 문화와 관습을 존중한다면 공식 행사에는 영부인이 참석하지 않는 게 더 나을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7월과 12월,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나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등이 영부인 없이 예방한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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