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 폭등 탓 고급식당들 영란세트 없애
식사 참석 인원 부풀리는 등 꼼수도 여전
권익위 "부패방지 보루... 개정 신중해야"
“한 끼에 3만 원 안 되는 식사 잡기가 하늘의 별따기예요.”
10년째 기업 대관 업무에 종사하는 A씨의 하소연이다. ‘김영란법’으로 불리는 ‘부정청탁및금품등수수의금지에관한법률(청탁금지법)’에서 허용하는 1인당 밥값 기준(3만 원)을 지키는 게 최근 들어 더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실제 고급 식당가에서 한 끼 가격을 2만9,000원대로 한정한, 이른바 ‘영란세트’가 사라지고 있다. 11, 12일 취재진이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역과 광화문 일대 식당을 둘러보니 영란세트를 팔던 식당 17곳 중 절반에 가까운 8곳이 해당 메뉴를 없애거나 단가를 높인 것으로 나타났다.
가장 큰 이유는 치솟은 물가다. 고기, 채소 등 식재료 가격뿐 아니라 임대료, 인건비 등 여타 비용까지 천정부지로 올라 허리띠를 졸라매는 자영업자가 크게 늘었다. 15년 넘게 국회 앞에서 한정식집을 운영 중인 이모(52)씨는 2만9,000원이던 점심 정식을 3만5,000원으로 인상했다. 대신 메뉴 가짓수를 조금 늘렸지만 손님들의 반응은 차갑다. 이씨는 “항의하는 손님이 많은 걸 잘 알지만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여의도의 또 다른 한정식집은 지난해 말 영란세트를 메뉴에서 뺐다가 고객 항의가 빗발쳐 1주일 만에 다시 만들기도 했다. 식당 관계자는 “매출이 뚝 떨어져 부랴부랴 되돌리긴 했는데, 살인적인 물가 탓에 단가를 맞추기가 쉽지 않아 고민이 크다”고 토로했다.
사실 한 끼 3만 원이 저렴한 밥값은 아니다. 그러나 고급 식당들의 푸념에도 나름 일리는 있다. 따로 방을 내어주는 영업 특성상 점심이든 저녁이든 정해진 시간에 대개 한 팀의 손님만 받는데, 회전율은 떨어지고 인건비는 오르니 가격에 반영할 수밖에 없다는 항변이다. 광화문의 한 일식집 관계자는 “정식 메뉴가 아니면 되도록 룸(방)을 주지 않았는데, 요즘엔 단품 손님에게도 룸 예약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불황이 길어져 어떻게든 수지타산을 맞추려면 어쩔 도리가 없다는 얘기다.
청탁금지법을 피하기 위한 꼼수도 여전하다. ‘정치 1번지’ 여의도에서 정치인들의 식사 자리는 참석 인원을 부풀리는 방식이 암암리에 통용되고 있다. 참석자 수를 알 수 있는 주문 내역은 빼고 총액만 기재된 영수증을 받은 뒤 실제 참석 인원보다 많은 숫자를 써내 정치자금법을 피해 가는 수법이다. 누가, 얼마나, 뭘 먹었는지를 모르니 3만 원이 넘는 정식을 시켜도 검증할 방법이 없다. 한 국회 관계자는 “의원실에서 정치자금으로 식비를 처리할 때 이런 식으로 하는 경우가 제법 있다”고 인정했다. 국회 앞 식당 관계자도 “총액만 나오게 영수증을 뽑아달라는 주문이 부쩍 늘었다”고 귀띔했다.
이 때문에 시대 변화에 맞춰 청탁금지법을 개정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꾸준히 제기된다. 김병욱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1월 발의한 식사 가액을 5만 원으로 상향하는 개정안은 지금도 국회에 계류 중이다. 그러나 이 법이 한국사회에 뿌리 깊게 박힌 부정부패를 해소할 단초라는 반론 역시 만만치 않다. 주무부처인 국민권익위원회는 “법 제정 취지를 감안해 한 끼 상한액을 올리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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