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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 목숨 앗아간 '무늬만 스쿨존', 서울에 26곳 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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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9세 목숨 앗아간 '무늬만 스쿨존', 서울에 26곳 더 있다

입력
2022.12.29 04:30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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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2021년 서울 사고 다발 스쿨존 26곳]
①보행로 없고 ②불법주차 ③신호등 미설치
허술한 안전망, 아슬아슬한 어린이 등하굣길
학교도 알지만 "민원 쇄도해 당장 개선 불가"

21일 서울 성북구 장위초 정문 앞 사거리에서 한 어린이가 보행로가 없는 차도 위에 서서 차량이 지나가길 기다리고 있다. 이서현 기자

21일 서울 성북구 장위초 정문 앞 사거리에서 한 어린이가 보행로가 없는 차도 위에 서서 차량이 지나가길 기다리고 있다. 이서현 기자

“학교 앞에선 살살 운전해야 하는데 더 빨리 가요.”

한국일보 2006년 5월 5일 자 기사다. 1995년 만들어진 ‘어린이보호구역(스쿨존)’의 실태를 점검하기 위해 서울 여러 초등학교를 둘러봤다. 결론은 쌩쌩 질주하고 불법 주차된 차량 탓에 여전히 어린이 등하굣길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는 것이다.

16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21일 오후 3시 서울 성북구 장위초 정문 옆 스쿨존. 검은색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이 쏜살같이 지나가자 두 학생이 비명을 질렀다. 교차 주행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비좁은 골목에 인도는 따로 없었다. 인근 주민 강모(41)씨는 “불법주차 차량이 있을 때 차가 지나가면 아이들이 벽에 찰싹 달라붙어야 한다. 누가 여기를 스쿨존이라고 하겠느냐”며 혀를 찼다. 실제 이곳에서는 최근 10년간 어린이 9명이 차에 치였다. 다행히 사망 사고는 없었지만 3명이 전치 3주 이상의 중상을 입었다.

스쿨존 시행 11년을 맞아 실태를 점검한 본보 기사

스쿨존 시행 11년을 맞아 실태를 점검한 본보 기사

스쿨존은 안전하지 않다. 이달 초 강남 언북초 스쿨존에서 9세 초등학생이 음주운전 차량에 치여 숨졌다. 도로 폭이 좁고, 차도와 인도의 구분이 없는 등 장위초와 ‘판박이’ 공간에서 어린 생명이 목숨을 잃었다. 등하굣길 안전을 보장해달라는 무수한 호소에도 당국은 손 놓고 있다가 참극을 막지 못했다.

다른 스쿨존들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도로교통공단 교통사고분석시스템(TAAS)’이 공식 집계를 시작한 2007년부터 지난해까지 서울 시내 초등학교 스쿨존 607곳에서 일어난 어린이 보행자 사고(차가 사람을 친 경우)는 825건. 이 가운데 26곳은 같은 스쿨존에서 5건 이상의 사고가 났다. 본보 취재진이 사고 다발 스쿨존을 직접 가보니 사고율이 왜 높은지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①보행로가 없고(73.1%) ➁불법주차 차량들이 즐비했으며(61.5%) ③횡단보도에 보행자 신호등은 설치되지 않았다(65.4%). 예나 지금이나 ‘무늬만 스쿨존’이 도처에 널려 있는 셈이다.

① 제대로 된 보행로는 어디에

21일 한 어린이가 서울 은평구 응암초 인근 골목을 걷고 있다. 보행로가 없어 차도로 통행해야 한다(왼쪽 사진). 같은 날 성북구 장위초 인근 스쿨존에서도 한 아이가 보행로 대신 차도를 걷고 있다. 오세운·이서현 기자

21일 한 어린이가 서울 은평구 응암초 인근 골목을 걷고 있다. 보행로가 없어 차도로 통행해야 한다(왼쪽 사진). 같은 날 성북구 장위초 인근 스쿨존에서도 한 아이가 보행로 대신 차도를 걷고 있다. 오세운·이서현 기자

이날 오후 2시 동작구 신상도초의 하교시간. 인도가 없어 위태로워 보이는 학교 정문 앞 골목에서 이모(9)양이 신발 끈을 묶으려 몸을 숙이자 두 살 터울의 친언니(11)가 “저쪽 빌라 입구에 가서 하자”며 말렸다. 언니 이양은 “여기는 차와 오토바이가 많이 다녀 무섭다”면서 동생 손을 꽉 잡았다. 부모가 자매를 학교에 보낼 때 하는 인사말은 하나다. “차 조심해라.” 이 스쿨존에서는 15년 동안 6건의 사고가 일어났다.

23일 오후 2시 서울 은평구 갈현초 정문 옆 골목에 '오전 8~9시, 오후 12~3시' 차량 통행제한을 알리는 이동식 바리케이드가 놓여 있다(위쪽 사진). 하지만 한 남성이 오후 2시 40분쯤 울타리를 치우자 차량이 곧바로 진입했다. 강지수 기자

23일 오후 2시 서울 은평구 갈현초 정문 옆 골목에 '오전 8~9시, 오후 12~3시' 차량 통행제한을 알리는 이동식 바리케이드가 놓여 있다(위쪽 사진). 하지만 한 남성이 오후 2시 40분쯤 울타리를 치우자 차량이 곧바로 진입했다. 강지수 기자

행정안전부의 ‘어린이ㆍ노인ㆍ장애인 보호구역 통합지침’을 보면, 폭 3m 이상인 도로는 길 양쪽에 폭 1.2m 이상의 도보를 설치해야 한다. 그러나 사고 다발 스쿨존 26곳 중 고작 7곳(26.9%)만 도로 양쪽에 인도가 마련돼 있었다. 강제성 없는 정부 지침은 있으나마나였다.

고육책으로 버티는 스쿨존도 있다. 15년간 7건의 사고가 터진 은평구 갈현초는 등하교시간(평일 오전 8~9시, 오후 12~3시)에 이동식 장애물을 설치해 차량의 도로 진입을 막는 ‘시간제 통행제한’을 시행한다. 그나마 이마저도 ‘눈 가리고 아웅’식으로 운영된다. 인근 주민들은 “실제론 등하교 시간에 10분 정도만 통행을 제한한다”고 했다. 23일 방문해보니 사실이었다. 오후 2시인데 후문 앞 도로에는 장애물이 보이지 않았다. 학교 관계자는 “불편하다는 주민 민원이 많아 어쩔 수 없이 축소 운영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② 보행로 침범의 원흉 '불법주차'

21일 서울 중랑구 면일초 인근 골목에 차량들이 불법 주차돼 있다. 이서현 기자

21일 서울 중랑구 면일초 인근 골목에 차량들이 불법 주차돼 있다. 이서현 기자

불법 주ㆍ정차는 스쿨존 사고를 유발하는 고질병이다. 지난해 10월 도로교통법 시행령 개정으로 스쿨존 내 차량 주ㆍ정차가 전면 금지됐다. 적발되면 승용차는 12만 원, 승합차 13만 원의 과태료를 내야 한다. 기존보다 3배 높은 고강도 제재다.

하지만 불법 주차를 방치한 사고 다발 스쿨존은 16곳(61.5%)이나 됐다. 이날 오후 송파 남천초 후문 인근에는 저학년 하교시간인데도 인도를 침범한 승용차 한 대가 떡 하니 주차돼 있었다. 인도를 따라 걷던 아이 4명이 차를 피해 차도 쪽으로 나오자 큰 트럭 한 대가 경적을 울리며 지나갔다. 2학년 학부모 김모(44)씨는 “불법 주차 차량을 피하다 아이들이 다칠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서울 사고 다발 스쿨존 지도. 그래픽=강준구 기자

서울 사고 다발 스쿨존 지도. 그래픽=강준구 기자

양천구 지향초 앞에도 방과후 학교를 마친 학생들이 하교하는 오후 5시에 차량 한 대가 통행로를 가로막고 있었다. 스쿨존이 주차금지 구역이라는 걸 모르냐고 묻자 차주는 “다른 차가 두 대나 있어 그냥 주차했을 뿐”이라며 머리를 긁적였다.

서울시에 따르면 개정안 시행 후 지난달까지 17만5,497건의 스쿨존 불법 주·정차 차량이 단속됐다. 매월 1만2,000~1만5,000건으로 시행령 개정 전과 큰 차이가 없었다. 김진유 경기대 도시교통공학과 교수는 “단순히 과태료 금액만 올릴 게 아니라 등하교 시간만이라도 인력을 배치하는 등 집중 단속이 병행돼야 불법 주차 문제를 근절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③ 횡단보도에 신호등이 없다

21일 서울 강남구 논현초 정문 앞에서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 위로 대형 화물차가 지나가고 있다. 강지수 기자

21일 서울 강남구 논현초 정문 앞에서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 위로 대형 화물차가 지나가고 있다. 강지수 기자

보행자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도 어린이를 위험에 노출시킨다. 사고 다발 스쿨존 17곳(65.4%)의 교차로 횡단보도에는 신호등이 설치돼 있지 않았다. 21일 오후 관악구 난우초 정문 앞에선 초등학교 3학년 학생이 멀리서 차가 오는 걸 본 뒤 먼저 건널 수 있다고 생각해 횡단보도에 발을 내디뎠다가 사고를 당할 뻔한 장면이 목격되기도 했다.

종로구 혜화초 4학년 유모(11)양도 같은 날 등굣길에 차를 4대나 보내고 나서야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를 겨우 건넜다. 여기서 2015년 10세, 2018년엔 5세 어린이가 횡단보도를 건너다 차에 치였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장일준 가천대 도시계획학부 교수는 “아이들은 차량을 발견해도 인지 반응이 느려 멈춰야겠다는 판단을 잘 못한다”고 설명했다.

"교통약자 배려, 어른들 인식부터 바꿔야"

13일 서울 강남구 언북초 학생들이 '스쿨존입니다!'라고 적힌 형광색 보호덮개를 씌운 가방을 메고 등교하고 있다. 뉴스1

13일 서울 강남구 언북초 학생들이 '스쿨존입니다!'라고 적힌 형광색 보호덮개를 씌운 가방을 메고 등교하고 있다. 뉴스1

스쿨존 시행이 30년 가까이 되면서 제도적 보완은 많이 이뤄진 편이다. 물론 과속 및 불법 주ㆍ정차 단속 장비를 늘리고 신호등 등 안전시설물을 설치하는 환경 개선 작업은 계속돼야 한다. 보다 근본적 문제는 사람이다. 교통약자를 배려하지 않는 어른들의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크고 작은 스쿨존 비극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임재경 한국교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학교 근처 내리막길에 과속방지턱 하나를 설치해도 시끄럽다는 주민 민원이 쇄도하는 게 현실”이라고 꼬집었다. 스쿨존에서는 속도를 줄이고 잠시라도 주차하지 않아야 한다는 교통 기본윤리를 다잡는 데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운전자 편의를 이유로 최근 ‘도로교통법과 특정범죄가중처벌법 개정안(민식이법)’을 완화해야 한다는 분위기 역시 경계할 필요가 있다. 2020년 3월 시행된 민식이법에 따라 스쿨존 차량 통행속도는 시속 30㎞로 제한되고, 안전운전 의무 부주의로 사망ㆍ상해 사고를 일으키면 가중 처벌된다.

그러나 민식이법 시행 후 스쿨존 사고 실태를 분석한 법제처는 규제 완화를 골자로 한 제도개선 과제를 경찰청 등 각 법령 소관 부처에 권고했다. 어린이 교통사고가 현저히 적은 심야시간대(0~6시)엔 스쿨존 운영을 탄력적으로 적용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이다. 이런 식으로 규제가 냉ㆍ온탕을 오가면 사고를 줄일 수 없다는 비판이 나온다. 박무혁 도로교통공단 교수는 “이제 자리를 잡아가는 민식이법을 완화하려는 움직임은 경각심을 줄여도 된다는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강지수 기자
오세운 기자
이서현 기자
이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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