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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이 지배하는 빌라 시장

입력
2022.12.28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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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가 몰려 있는 서울 강서구 화곡동 빌라촌. 배우한 기자

빌라가 몰려 있는 서울 강서구 화곡동 빌라촌. 배우한 기자


“그 사람 보증금 사고 친 전력까지 있다면서요? 그런데도 어떻게 계속 빌라를 무자본으로 사들일 수 있었죠?”

한국일보가 ‘빌라왕 추적기’를 취재·보도하는 과정에서 피해자들이 분노한 지점이다. 전세보증보험을 담당한 공기업은 보증금 사고가 연이어 발생했음에도 블랙리스트 경보를 뒤늦게 발령했고, 정부는 언론 보도 이후에야 부랴부랴 대책 마련에 나섰으며, 국회는 입법(조세채권의 후순위 설정)에 굼떴다.

그사이 서민 주거지인 빌라촌은 무법지대가 됐다. 마이바흐를 탔다는 빌라왕, 그리고 여기저기서 한몫 챙긴 수많은 빌라 빌런들의 ‘대박 스토리’는 이 나라 주거정책의 뼈아픈 실패로 기록될 것이다. 사전 예방, 실시간 감시, 사후 처리에서 총체적 관리 부실을 노출했다. 빌라가 만만한 먹잇감이란 사실이 만천하에 알려졌는데, 앞으로 누가 선뜻 수억 원의 보증금을 빌라에 넣으려 하겠나.

“빌라에 안 살면 그만”이라고 만만히 볼 문제는 아니다. 서울 주택 30%가 빌라다. 생활 패턴상 굳이 아파트나 주상복합에 살 필요 없는 사람도 많다. 직주근접이 중요한 사람, 주차·학군·편의시설을 고려할 필요가 없는 이들, 그 밖의 여러 이유 때문에 주거에 많은 비용을 들이려 하지 않는 수요자에겐 빌라가 더 나은 선택일 수 있다.

“일부 지역에 국한된 현상”이라고 위험을 낮게 볼 것도 아니다. 이미 수도권 서남부 빌라 시장은 신뢰를 상실한 레몬 마켓이다. 공급자(건축주와 바지 주인)는 상품의 하자(가격 과대ㆍ조세 미납에 따른 압류 가능성)를 숨겨 팔고, 수요자(임차인)는 언제 사기 당할지 몰라 불안에 떨어야 한다.

빌라왕 김모씨 소유 주택 분포 상위 10곳

빌라왕 김모씨 소유 주택 분포 상위 10곳


빌라가 신뢰를 잃으면 아파트 선호는 더 심해진다. 주택 수요자들이 빌라를 애초에 고려 대상으로 여기지 않으면, 전체 시장에 수요 왜곡이 온다. 전세 수요가 아파트로만 쏠려 ‘전세대출 급증→전세가 급등→갭투자 증가→아파트 매매가 상승’이라는 공식이 반복될 수 있다. 아파트와 빌라 가격 양극화도 심해질 것이다.

빌라의 실패는 사회적 비용 증가로도 이어진다. 전세 사고 급증은 보증기관 부실로 이어지고, 선량한 임차인들이 부담하는 보증보험료도 오른다. 결국 소수 사기꾼들이 주동한 분탕질의 대가를 다수 국민이 나눠 져야 한다.

일단 전세사기 일당을 신속 검거하는 게 급선무다. 인과응보 차원에서도 그래야 하지만, 대대적 단속이 시작되면 사기 세력의 활동이 주춤해져 추가 피해자가 줄어드는 효과를 볼 수 있다.

보완책도 빨라야 한다. 대책의 핵심은 정보 불평등을 해소해 빌라 시장을 레몬 마켓으로 방치하지 않는 것이다. 빌라 사기는 신축 빌라 가치가 제대로 측정되지 않아 ‘부르는 게 값’이 된다는 점에서 시작된다. 감정가를 부풀려 적정 매매가보다 많은 금액을 전세보증금으로 요구한 뒤, 그 보증금으로 분양대금을 치르는 게 이 사기의 수법이다. 정확한 임대인 정보를 임차인에게 미리 알려주는 시스템도 필요하다. 피해자 중에는 빌라왕의 세금 체납 사실을 전혀 몰랐던 이들이 많았다.

빌라촌에서 발생한 대규모 전세사기는 일종의 시장 실패(market failure)다. 기존 규제와 시장참여자의 자율성만으로 시장이 정상 작동하지 않은 사례다. 시장 실패는 정부 개입으로 보완할 수밖에 없다. 주택 공급의 30%를 담당하는 빌라 시장의 불신 팽배를 더 방치해선 안 된다. 시장 한구석에서 싹튼 불신은 시장 전체 건전성을 단숨에 위협할 정도로 무섭게 번지는 법이니까.


이영창 산업2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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