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지난 21일(현지시간) 약 8,000km를 날아가 미국 국회의사당 연단에 올랐다. 그는 우크라이나 지원 450억 달러(약 57조 원)가 포함된 2023년도 예산안 통과를 간곡히 부탁하며 미 의회에 호소했다. “1944년 나치독일과 싸웠던 용감한 미군들처럼, 우리도 푸틴에 똑같이 맞서고 있다.” 그는 격전지 돈바스 지역 바흐무트를 찾았을 때의 황토색 부츠차림 그대로였다. “여러분의 돈은 기부가 아니라 세계 안보와 민주주의에 대한 투자”라며 영어로 연설하는 20분간 21번의 기립박수가 터져 나왔다.
□ 극비 방미는 2차대전 중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습 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이뤄진 처칠 영국 총리의 행보와 비슷하다. 그는 12월 26일 미 의회 연설에서 “미국이 진정으로 자유를 위해 칼을 뽑고 칼집을 버렸다”고 말했다. 젤렌스키로 인해 히틀러에게 대항해 싸우던 처칠을 떠올리게 된 것이다. 젤렌스키의 진면목은 전쟁 발발 열흘 뒤 연 회견에서 드러났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두렵지만 나는 대통령으로서 죽음을 겁낼 권리가 없다.”
□ 무명의 정치인이던 버락 오바마도 디딤돌이 된 명연설이 존재한다. 2004년 7월 27일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담대한 희망’이란 키워드로 대선후보 존 케리를 압도하는 주목을 받았다. “약값과 집세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고령자가 계신다면 그분이 내 할머니가 아니더라도 내 삶도 그만큼 궁핍해지는 겁니다.” 냉전의 벽을 허문 강한 신념의 레이건, 미국 신세대에게 자발적 행동을 촉구한 케네디 등이 명연설가로 회자된다.
□ 국민을 감동시킬 촌철살인의 한마디는 정치인에게 영원한 숙제다. 화려한 수사로 치장하지만 진실이 담긴 연설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국내에선 김대중, 노무현이 대표적 명연설가다. 민주화투쟁 같은 정치이력에서 메시지의 힘이 나온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연설 잘하는 정치인은 드물어졌다. 각론에서 특정사안에 전문성을 발휘하는 편이 먹힌다. 지난 정부 때 임대차 3법 개정안을 일방 통과시키는 와중에 당시 야당 윤희숙 의원이 “저는 임차인입니다”로 시작한 국회연설 정도가 기억날 뿐이다. 새해에는 힘든 국민 삶에 묘안을 제시하는 번뜩이는 연설이 출현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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