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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 참전용사들이 남기고 간 마음

입력
2022.12.22 22:0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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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 디디마 신전 ⓒ게티이미지뱅크

튀르키예 디디마 신전 ⓒ게티이미지뱅크

두 팔을 한껏 벌려봐야 사분의 일도 감싸 안지 못하는 거대한 기둥들이 늘어섰다. 그렇게 용하다는 아폴론의 신탁을 받기 위해 역대 황제들이 심란할 때마다 찾았다는 디디마(Didyma) 신전이다. 알렉산더 대왕에게 '제우스의 아들'이라는 흡족한 신탁을 내려준 덕에 흥성했다가, 그리스도교가 득세한 후로는 이교도 신앙이라 불리며 금지된 장소. 신관만 머물던 귀한 마을도 이제는 몇 번이고 버스를 갈아타야 닿는 작은 시골 동네가 되었다.

"코리안?" 1,600년 전에 버려진 신전 말고는 가게 하나 변변치 않아 바로 떠나려는 여행자들을 불러 세우는 목소리였다. 가방을 열어 주섬주섬 물건까지 꺼내니 잡상인인가 의심하던 눈빛은 오래된 흑백사진을 들여다보고서야 풀렸다. 스무 살 청년으로 한국전에 참전했던 할아버지는 그저 낡은 군복에 달린 훈장을 자랑스레 내어 보이며 한국인들과 인사를 하고 싶을 뿐이었다. 2000년대 초반에 튀르키예 디디마를 여행했다면 꼭 한번 다시 만나고플 이름, 카짐 할아버지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462명의 전우를 묻고 온 한국 땅의 안부가 늘 궁금했다. '일당백'이라 불릴 만큼 참전군 중에서도 용맹한 부대였지만, 전쟁고아들에게는 이 젊은 군인들이 더없이 다정한 부모였다. 전선에서 떠도는 아이들을 하나둘 구조해와서 보호한 것이 그 시작. 부대마다 돌봐야 할 아이들이 계속 늘어나 전투마저 어려운 지경이 되자 당장 아이들이 몸을 누일 고아원부터 급히 마련했고, 이 고아원은 훗날 앙카라학원이 되어 전쟁에서 상처 입은 아이들이 세상을 살 터전이 됐다. 병사들이 자기 목숨을 걸고 받는 파병 월급에서 십시일반 모은 돈이었다. 이 앙카라학원이 있던 곳이 수원의 서둔동, 지금은 '앙카라길'이라는 거리 이름으로만 남았다.

영화 '아일라' 포스터 ㈜영화사 빅 제공

영화 '아일라' 포스터 ㈜영화사 빅 제공

코로나가 퍼지기 전인 2018년 겨울, 이스탄불을 같이 걷던 현지인 친구가 불쑥 물었다. "아일라(Ayla) 봤지? 난 보면서 어찌나 울었는지… 창피했어." 머쓱하게 영화관에서의 일화를 털어 놓는 그에게 살짝 민망해졌다. 폭격으로 부모를 잃고 실어증에 걸린 소녀를 지극 정성으로 돌본 참전용사의 실화를 토대로 한 영화였는데, 528만 명이라는 튀르키예의 흥행기록에 비하면 한국의 관람객은 고작 4만 명이었다. 그만큼 우리가 눈 감고 있는 역사의 한 토막이다.

가혹한 시절일수록 소소한 따뜻함이 사람을 살게 한다. 배고파가며 아껴둔 사과를 부상병에게 건넨 소녀의 마음은 아흔 살 참전용사의 뇌리에 선명하게 남았고, 비좁은 막사를 기꺼이 나누던 군인 청년의 마음은 전쟁터를 떠돌던 고아를 일흔 살 노인으로 멀쩡히 살게 만들었다. 유난히 붉은 튀르키예 국기에 새겨진 초승달과 별은 이슬람을 상징한다지만, 종교와 상관없이 빨간 깃발을 휘날리며 찾아 온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산타가 아니었을까?

기념사진만 찍고 돌아섰던 여행자들은 카짐 할아버지에게 전할 수 있는 감사 인사가 모자라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아직 생존한 참전용사 600여 명 중 몸이라도 움직일 수 있는 분은 겨우 70여 명. 신이 보내 준 선물처럼 여겨지도록 노력했다는 어느 참전용사의 말처럼, 이제는 우리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잊히지 않을 선물이 되어줄 차례인가보다.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기억하는 것, 그래서 그 힘으로 잊히지 않을 선의를 퍼트리는 것. 인간의 존엄은 그렇게 차근차근 지켜지는 게 아닐까 싶다.



전혜진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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