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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장갑부터 무지개 완장까지... 스포츠는 정의를 외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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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장갑부터 무지개 완장까지... 스포츠는 정의를 외쳐왔다

입력
2022.11.26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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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무릎꿇기·이란 선수 침묵... '저항 퍼포먼스'
IOC·FIFA 정치적 중립 앞세우지만, 이중잣대 논란도
인간 보편적 가치·권리 옹호하는 의사 표현 허용돼야

21일 카타르 도하의 칼리파 인터내셔널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2 카타르 월드컵 조별리그 B조 1차전 잉글랜드 대 이란 경기. 잉글랜드 선수들이 경기 전 모든 차별에 반대한다는 뜻에서 무릎을 꿇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2020년 5월 미국에서 백인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 뒤로 무릎꿇기 퍼포먼스는 '흑인의 목숨은 소중하다'는 메시지를 담은 블랙라이브즈매터(Black Lives Matter·BLM) 운동의 일환으로 전 세계에 확산했다. 카타르=연합뉴스

21일 카타르 도하의 칼리파 인터내셔널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2 카타르 월드컵 조별리그 B조 1차전 잉글랜드 대 이란 경기. 잉글랜드 선수들이 경기 전 모든 차별에 반대한다는 뜻에서 무릎을 꿇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2020년 5월 미국에서 백인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 뒤로 무릎꿇기 퍼포먼스는 '흑인의 목숨은 소중하다'는 메시지를 담은 블랙라이브즈매터(Black Lives Matter·BLM) 운동의 일환으로 전 세계에 확산했다. 카타르=연합뉴스

초록색 그라운드가 차별과 탄압에 반대하는 저항의 무대로 탈바꿈하는 순간은 짧지만 강했다. 지난 21일(현지시간) 카타르 월드컵 B조 조별리그 이란과 잉글랜드 경기가 열린 도하 칼리파 인터내셔널 스타디움. 경기 시작을 알리는 심판의 휘슬이 울리기 직전 잉글랜드 선수들은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세상 모든 차별에 반대하는 무언의 외침이었다.

잉글랜드를 비롯한 일부 유럽 대표팀 주장들은 카타르 정부의 성소수자 인권 탄압 의 부당함을 알리고자 다양성과 포용의 의미를 담은 '무지개 완장'을 착용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경기 중 착용시 옐로카드 부과까지 꺼내 든 국제축구연맹(FIFA) 반대에 부딪히자, 무릎꿇기 퍼포먼스로 맞불을 놓은 것이다.

이란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들이 21일 카타르 도하의 칼리파 인터내셔널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2 국제축구연맹(FIFA) 카타르 월드컵 B조 조별리그 1차전 잉글랜드와의 경기 시작 전, 이란 국가가 나오자 제창하지 않고 입을 굳게 다문 채 서 있다. 이란 응원단도 반(反)정부 시위 메시지를 담은 현수막과 옷을 착용한 채 응원에 나서고 있다. 도하=신화 통신·연합뉴스, AP·뉴시스

이란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들이 21일 카타르 도하의 칼리파 인터내셔널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2 국제축구연맹(FIFA) 카타르 월드컵 B조 조별리그 1차전 잉글랜드와의 경기 시작 전, 이란 국가가 나오자 제창하지 않고 입을 굳게 다문 채 서 있다. 이란 응원단도 반(反)정부 시위 메시지를 담은 현수막과 옷을 착용한 채 응원에 나서고 있다. 도하=신화 통신·연합뉴스, AP·뉴시스

상대팀 이란 선수들은 '침묵'으로 응수했다. 국가가 연주될 때도 따라 부르지 않았고, 골을 넣었을 때도 환호하지 않았다. 이들은 '행동하지 않음'으로 행동했다. 히잡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에 붙잡힌 뒤 의문사한 22세 마흐사 아미니 사건이 촉발한 '이란 반(反)정부 시위'와 연대하려는 무언의 손짓이었다.

관중석도 화답했다. 응원석 곳곳에 '여성, 생명, 자유'라고 적힌 손팻말과 현수막이 나부꼈고, 페르시아어로 '자유'를 뜻하는 '아자디' 함성이 울려 퍼졌다. 그날, 그곳, 스포츠와 정치가 만들어낸 시너지는 "축구 경기, 그 이상"(영국 BBC 방송)이었다.

역대로 스포츠와 정치는 섞여서도, 엮여서도 안 될 '잘못된 만남'으로 규정돼 왔다. '스포츠는 스포츠일 뿐, 정치를 끌어들이지 말자'는 게 올림픽과 월드컵 등 세계적 스포츠 대회가 참가 선수들에게 내건 불문율이었다. 그러나 스포츠 정신에 정치를 넘어 정의를 담으려는 시도는 꾸준했고, 때때로 그 간절한 외침은 정치가 못 한 일을 대신 해내기도 했다.

인종 차별 저항의 상징 '검은 장갑' 시위 이후 정치 중립 규정 만들어져

1968년 멕시코 올림픽 남자육상 200m 동메달리스트 존 카를로스(오른쪽부터)와 금메달리스트 토미 스미스가 시상식에서 인종 차별 저항의 의미로 검은 장갑을 낀 채 주먹을 높이 들고 있다. 워싱턴포스트 캡처

1968년 멕시코 올림픽 남자육상 200m 동메달리스트 존 카를로스(오른쪽부터)와 금메달리스트 토미 스미스가 시상식에서 인종 차별 저항의 의미로 검은 장갑을 낀 채 주먹을 높이 들고 있다. 워싱턴포스트 캡처

스포츠 무대에서 논란이 된 정치적 의사표현의 시초는 '검은 장갑'이었다.

1968년 10월 멕시코 올림픽 남자육상 200m 경기 시상식. 미국의 토미 스미스(금메달)와 존 카를로스(동메달)가 검은색 스카프를 두른 채 시상대에 올랐다. 미국 국가가 흘러나오자 두 선수는 성조기를 외면한 채 검은 장갑을 낀 주먹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흑인 인권운동을 이끌다 암살당한 마틴 루서 킹 목사에 대한 추모와 인종 차별에 대한 저항의 표시였다.

퍼포먼스의 대가는 가혹했다. 올림픽 경기에서 정치적 행위를 금지한다는 이유로 두 선수는 선수촌에서 추방당했고, 선수 자격 정지로 더 이상 올림픽에 나갈 수 없게 됐다. 국제올림픽 위원회(IOC)는 이 사건 이후 올림픽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한 규정을 만들었다.

"올림픽이 열리는 장소, 경기장 등 기타 지역에서 어떠한 종류의 시위나 정치적·종교적·인종적 선전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IOC 헌장 50조 2항이다. 국제축구연맹(FIFA)도 축구 경기장 안에서의 정치 및 종교 행위를 엄격히 금지하며 발맞췄다.


2012년 8월 10일 런던 올림픽 당시 영국 카디프 밀레니엄 스타디움에서 일본과 동메달 결정전을 마치고 열린 승리 세리머니에서 올림픽 축구대표팀 박종우 선수가 '독도는 우리땅'이라고 적힌 종이를 들고 그라운드를 돌고 있는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2012년 8월 10일 런던 올림픽 당시 영국 카디프 밀레니엄 스타디움에서 일본과 동메달 결정전을 마치고 열린 승리 세리머니에서 올림픽 축구대표팀 박종우 선수가 '독도는 우리땅'이라고 적힌 종이를 들고 그라운드를 돌고 있는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후 헌장 50조 2항을 필두로 한 정치 행위 금지 규정들은 선수들의 정치적 의사 표현을 옭아매는 '족쇄'로 활약했다. 2012년 런던 올림픽 당시 한국의 박종우 선수도 일본과의 축구 동메달 결정전에서 승리한 직후 '독도는 우리땅'이란 문구가 적힌 종이를 들고 경기장을 뛰어다닌 것이 문제가 돼 A매치 2경기 출장 정지 및 400만 원의 벌금을 내는 징계를 받았다.

지난 1월 세계적 테니스 대회인 호주 오픈에선 '펑솨이는 어디에'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고 응원에 나선 관중들을 주최 측이 쫓아내는 일도 있었다. 펑솨위는 중국의 유명 테니스 선수로 중국 전 고위 공무원에게 성폭력 피해를 당했다고 폭로한 뒤 행방이 묘연해지며 실종설이 돌았던 인물이다. 주최 측은 처음에는 정치적 구호는 금지된다고 원칙론을 밝히며 강경 대응했지만,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펑솨이 티셔츠' 착용을 마지못해 허용하기도 했다.

'돈줄' 앞에선 작아지는 '선택적 중립', 선수들만 옥죄는 '이중잣대' 비판도

2021년 7월 23일 일본 도쿄 올림픽 스타디움 주변 거리에서 2020 도쿄 올림픽 개막식 개최를 기다리고 있는 일본 시민들 중에는 욱일기를 들고나온 사람도 있었다. 도쿄=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2021년 7월 23일 일본 도쿄 올림픽 스타디움 주변 거리에서 2020 도쿄 올림픽 개막식 개최를 기다리고 있는 일본 시민들 중에는 욱일기를 들고나온 사람도 있었다. 도쿄=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IOC가 정치적 편을 든다면, 수백 개의 국가들을 올림픽에 하나로 모을 수 없다. 올림픽의 정치 이슈화는 올림픽의 종말을 가져올 것이다."

2022 베이징 동계 올림픽을 앞두고 중국의 소수민족 탄압 등 인권 문제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왔지만, IOC 토마스 바흐 위원장의 답변은 '어느 편도 들지 않겠다'였다. 정치적 의사 표현이 또 다른 갈등을 유발하는 빌미가 돼 통합과 평화의 방점을 찍은 올림픽 정신을 방해한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이 같은 원칙론이 현실에선 '선택적 중립'으로 군림하고 있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IOC와 FIFA 등이 '돈줄'을 쥐고 있는 후원사나 개최국의 눈치를 보는 경우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 2020 도쿄 하계 올림픽 당시 일본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욱일기 사용 금지에 대해 IOC가 모호한 태도를 보인 게 대표적이다.

하자 라비브(오른쪽) 벨기에 외무장관이 23일 2022 카타르 월드컵 벨기에와 캐나다의 조별리그 경기가 열리는 알라이얀의 아흐마드 빈 알리 스타디움에서 차별 반대를 뜻하는 '원 러브' 무지개 완장을 팔에 두르고 잔니 인판티노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알라이얀=AP 뉴시스

하자 라비브(오른쪽) 벨기에 외무장관이 23일 2022 카타르 월드컵 벨기에와 캐나다의 조별리그 경기가 열리는 알라이얀의 아흐마드 빈 알리 스타디움에서 차별 반대를 뜻하는 '원 러브' 무지개 완장을 팔에 두르고 잔니 인판티노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알라이얀=AP 뉴시스

이번 카타르 월드컵에서 FIFA는 성소수자 차별에 반대하는 무지개 완장을 막는 데 급급한 모습이다. 경기 중 선수들의 무지개 완장 착용을 불허하며 으름장을 놨고, 무지개 옷을 입거나 상징물을 부착한 축구 팬들은 경기장 입장이 거부되기도 했다. 동성애를 불법으로 처벌하는 카타르 정부를 다분히 의식한 행보였다.

FIFA가 카타르 정부의 '심기 경호'에 적극적인 걸 두고, 역대급 수입을 안겨줬기 때문이란 분석도 나온다.

'역사상 가장 비싼 월드컵'으로 불리는 이번 월드컵 유치 비용은 300조 원. 이전 8번의 개최국보다 2배 이상 많은 돈을 썼다. 뿌린 돈이 많은 만큼 FIFA도 상당한 돈방석에 앉았다. AP 통신은 FIFA가 카타르 월드컵 덕분에 10조 원을 넘게 벌어들였다고 추산했을 정도다. TV 중계권료와 경기장 입장료, 공식 후원 대가 등의 명목으로 챙긴 금액이다.

'검은 장갑' 시위의 주인공 존 카를로스 선수는 지난해 5월 영국 일간 가디언 기고 글에서 "지난 53년 동안 돈을 좇아온 IOC의 행태는 달라지지 않았다"고 일갈했다. FIFA도 이 비판에서 예외일 수 없다.

IOC나 FIFA가 국가 권력과 자본 권력에는 관대하면서, 선수들에게만 정치적 중립을 강요하는 행태가 계속되자 '이중잣대'라는 지적도 적지 않다. '정치적 중립을 내세우지만, 가장 정치적인 기관'이라는 '내로남불' 꼬리표가 따라 붙는 이유다.

"중립은 침묵, 우리는 침묵하지 않겠다"...정치 넘어선 '정의' 허용돼야

23일 알라이얀의 할리파 인터내셔널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2 카타르 월드컵 E조 일본과 독일의 경기에서 독일 선수들이 입을 막은 채 단체사진을 찍고 있다. 성소수자 인권을 탄압하는 카타르 정부와 정치적 중립을 강요하는 FIFA의 지침에 항의하는 뜻을 담은 것이란 분석이 나왔따. 알라이얀(카타르)=뉴스1

23일 알라이얀의 할리파 인터내셔널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2 카타르 월드컵 E조 일본과 독일의 경기에서 독일 선수들이 입을 막은 채 단체사진을 찍고 있다. 성소수자 인권을 탄압하는 카타르 정부와 정치적 중립을 강요하는 FIFA의 지침에 항의하는 뜻을 담은 것이란 분석이 나왔따. 알라이얀(카타르)=뉴스1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정치적 중립 원칙 자체에도 의문부호가 찍히고 있다.

인간의 기본권인 표현의 자유를 지나치게 침해하는 것이 타당하냐는 반론이다. 또 차별 반대, 전쟁 반대처럼 인권과 평등, 평화, 다양성 등 보편적 가치를 옹호하는 메시지가 올림픽 정신에 어긋난다고 보는 것 역시 무리라는 지적이다.

스포츠 무대에서의 정치적 의사 표현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한 사례도 있다. 2006년 독일 월드컵 조별리그에서 코트디부아르 국가대표 주장 디디에 드록바는 수단과의 경기를 승리로 이끈 뒤 취재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제발 일주일만이라도 무기를 내려놓자"고 울부짖었다. 고국의 내전을 멈춰달라는 호소였다. 드록바의 절절한 외침이 가닿았던 걸까. 거짓말처럼 정부군과 반군은 정말로 전쟁을 멈췄고, 2007년 평화협정까지 체결했다. 정치가 못했던 일을 스포츠가 해낸 것이다.

미국 해머던지기 선수 그웬 베리가 2019년 페루에서 열린 팬아메리칸 경기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뒤 시상식에서 '주먹 들어올리기' 시위를 하고 있다. 트위터 캡처

미국 해머던지기 선수 그웬 베리가 2019년 페루에서 열린 팬아메리칸 경기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뒤 시상식에서 '주먹 들어올리기' 시위를 하고 있다. 트위터 캡처

계속된 저항의 외침에 변화도 시작됐다.

2019년 페루에서 열린 팬아메리칸 게임 시상식에서 국가 연주 중 조용히 고개를 떨구며 주먹을 들었던 미국 해머던지기 선수 그웬 베리. 미국 올림픽·패럴림픽위원회(USOPC)는 51년 전 IOC가 토미 스미스와 존 카를로스를 억압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중립 위반 이유를 들어 제재를 가했다.

하지만 여론은 들끓었고, 백악관도 "헌법이 부여한 평화적으로 항의할 권리를 존중한다"며 베리를 옹호했다. 결국 USOPC는 베리의 퍼포먼스를 계기로, 메달 시상식 때 선수들이 '무릎꿇기' '주먹 들어올리기' 등 인종 차별 반대 표시를 해도 징계하지 않기로 방침을 바꿨다. 변화는 또 다른 행동으로 이어졌다. 2020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미국의 전·현직 선수, 인권운동가 등 150명이 IOC에 정치적 중립 규정의 포괄적 재검토를 요청하며 50조 2항의 '완고함'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고 나선 것이다.

"중립을 지키라는 건 침묵하라는 의미다. 침묵은 불평등을 받아들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침묵하지 않겠다."(그웬 베리) 인간의 보편적 권리와 가치를 지키려는 행동 위에 군림할 수 있는 건 없다. 1968년 검은 장갑에서 2022년 무지개 완장까지. 정치를 넘어 정의를 외쳐온 스포츠 선수들이 만들어나갈 변화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강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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