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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팔만대장경 옆에 모셔진 한 군인의 위패

입력
2022.11.17 19:00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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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현
자현스님ㆍ중앙승가대 교수
경남 합천군 해인사 장경판전에 보관된 팔만대장경. 작은 사진 속 인물은 6·25 당시 해인사 폭격 명령을 거부한 고 김영환 공군장군. 연합뉴스

경남 합천군 해인사 장경판전에 보관된 팔만대장경. 작은 사진 속 인물은 6·25 당시 해인사 폭격 명령을 거부한 고 김영환 공군장군. 연합뉴스


팔만대장경 봉안 장경각 옆의 위패
6·25 때 폭격 거부했던 김영환 장군
더 큰 정의 위해 원칙 버린 아름다움

내게도 제법 많은 책이 우편으로 온다. 봉투를 뜯다 눈에 확 들어온 자극적인 제목, '해인사는 불타고 있는가?'. 책을 보는 순간 몇 년 전 해인사를 참배했을 때 일이 떠올랐다.

당시 불교의 해양 전파 문제로 해인사 주지 스님이 나를 초청해 주셨다. 덕분에 25년 만에 해인사에 갔는데, 나는 실상 잿밥에 관심이 더 있었다. 잿밥이란, 팔만대장경이 봉안된 장경각에 들어가 보는 것이다.

스님의 최고 장점 중 하나는 불교 문화재에 대한 접근이 쉽다는 점이다. 그러나 장경판전과 팔만대장경은 초특급 국보이자, 유네스코 문화유산과 기록유산이라는 2관왕이다. 이런 경우는 제아무리 스님이라도 접근이 녹록지 않다.

내가 부탁을 드리자 주지 스님께서는 손수 장경판전의 문을 열고 설명까지 해 주셨다. 이 과정에서 눈에 띈 건 돌아가신 분을 모신 위패였다. 나는 눈을 의심했다. 어떻게 이런 신성한 공간에 위패가 있단 말인가? 주지 스님은 내게 진기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한국전쟁 당시 전국의 규모 있는 사찰은 총 969곳이었다. 그런데 이 중 약 25%인 180곳이 전쟁 과정에서 소각 및 파괴되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다수가 아군에 의한 만행이었다는 점이다. 산사는 북한군의 거점이 될 수 있으므로 야만적인 파괴가 단행된 것이다.

1951년 해인사 역시 폭탄 투하를 통해 사라질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했다. 이때 공중 폭격의 책임자였던 김영환 대령은 상부의 명령을 어기고 단독으로 해인사 폭격을 중지한다. 당시 김 대령은 이승만의 경무대로부터 "해인사는 불타고 있는가?"라는 무전을 받기도 했다. 전쟁 중 대통령 직속의 경무대까지 관여된 명령에 불복한다는 것은, 대장부의 심장과 문화적인 강력한 확신이 없었다면 단행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실제로 김영환은 군법회의에 불려 나갔을 때, "팔만대장경을 지키기 위해 철수했다"라고 당당한 소신을 천명했다. 훗날 우리 정부는 김영환 장군에게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구한 공로로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당시 김영환은 절체절명의 해인사를 구한 대신, 자신이 절체절명의 상황에 봉착했었다.

만일 김영환이 죽음을 불사하고 구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니 인류는 불교를 넘어 최고 목판 인쇄술의 결정체를 영원히 잃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1872년 흥선대원군이 당백전을 주조하기 위해, 통일신라 때 조성된 높이 5.6m에 달하는 법주사의 대불을 녹인 것과 같은 야만적 행위가 또다시 재현될 뻔한 실로 아찔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이 김영환 장군의 위패가 해인사 장경판전 안의 양지바른 곳에 봉안되어 있다.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구한 은혜를 사찰에서는 최고의 예우로 갚고 있는 것이다.

해인사 주지 스님께 위패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잔잔한 감동에 잠겼다. 목숨을 걸고 항명하며 문화유산을 지켜낸 진정한 군인, 그리고 이 은혜를 갚기 위해 불교의 원칙을 어기면서까지 최고의 성보인 팔만대장경 옆에 위패를 모신 해인사 스님들. 이들은 모두 자랑스러운 영웅이 아닐 수 없다.

원칙은 우리 사회와 인류문명을 구성하고 유지하는 기준이 된다. 그러나 때론 더 고귀한 정감 속에 무너지며 아름다운 여운을 남기기도 한다. 이런 숭고함이 해인사에 깃들어 있는 것이다.

해인사는 매년 김영환 장군을 기리는 호국추모제를 열고 있다. 이 제의는 해인사가 존재하는 한 계속되며, 거대한 아름다움의 향연으로 시대를 흐르며 영원할 것이다.

자현 스님·중앙승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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