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채 한도 확대·도매가 인하 '고육책'에도
레고랜드發 자금경색에 '발목'... 진퇴양난
채권·대출·출자 모두 한계... "인상 불가피"
“물가와 민생 경제 안정을 정책의 최우선으로 삼겠다.”
지난달 4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의 기획재정부 국정감사는 추경호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의 결연한 다짐으로 시작됐다. 추 부총리는 나흘 전 ‘비상경제장관회의’에서 전기 수급비용을 충당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전기요금 인상폭을 물가 안정 명분으로 관철하고 온 터였다. 그랬는데도 지난달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소폭이나마 수그러들었던 8, 9월과 달리 오름세로 돌아섰다. 전기료를 붙잡지 못했다면 지표는 더 악화했을 게 분명하다.
지금 한국전력은 빚더미에 올라앉아 있다. 비싸게 전기를 사다가 싸게 팔다 보니 영업손실이 올해 3분기까지 벌써 22조 원 가까이 쌓였다. 지난해 적자는 6조 원이 되지 않았다. 적자는 고스란히 빚이다. 이달 10일까지 회사채 발행액 규모가 25조 원대다. 지난해 전체 발행액(10조 원 남짓)을 넘어선 지 오래다.
전기료를 충분히 올려 주기 힘든 형편인 기재부는 한전을 달래려 고육책을 짜냈다. 우선 합법적으로 빚을 더 낼 수 있도록 당정을 움직여 걸림돌을 치워 주기로 했다. 자본금과 적립금의 2배인 기존 사채 발행 한도를 10배로 늘리는 한전법 개정안이 9월 말 추 부총리의 공언과 보조를 맞춘 여당 의원에 의해 발의됐고, 현재 산업통상자원부도 정부 개정안을 준비 중이다.
아울러 한전이 구매하는 전깃값을 낮춰 주려 민간 발전사의 반발을 무릅써 가며 ‘상한제’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산업부 차관이 조만간 발전업체 경영자들을 만나 협조를 요구할 것으로 전해졌다. 시장 개입을 최소화한다는 현 정부의 기치가 무색하다는 게 업계 불만이다.
전부 물가 한번 잡아 보겠다는 일념에서 쏟은 안간힘이지만, 헛수고로 끝날 공산이 자꾸 커지는 게 지금 기재부의 처지다. 고금리 여파로 가뜩이나 위축됐던 자금시장이 ‘레고랜드 사태’로 완전히 경색되는 바람에 물가 상승세가 진정될 때까지 채권으로 급전을 조달하도록 한전을 유도하려던 계획이 꼬였고, 그 와중에 한전의 영업실적이 공개됐다. 산업부 장관의 전기료 현실화 필요성 언급을 막을 구실이 궁색해진 것이다.
기재부에 남은 해법은 ‘전기료 현실화’라는 정공법뿐이라는 게 전문가들 조언이다. 기업 유동성 위기를 부추기고 금리를 밀어 올리는 한전채 추가 발행은 물론, 은행 대출 역시 결국 은행채 발행으로 이어질 개연성이 짙은 만큼 똑같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은 공통된 지적이다. 당장 지표 분식(粉飾)을 위해 현실 직시를 미루고 실상을 왜곡하면 한국은행이 통화정책을 제대로 펼 수 없기 때문에 언젠가 신뢰가 추락할 날이 닥치고, 서민의 고금리 고통은 장기화할 수 있다는 비판(석병훈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도 제기된다.
정부 재정 투입 방안은 실현 가능성이 떨어진다. ‘건전 재정’ 기조에 어긋날 뿐 아니라 정부 지분이 51%인 한전의 사실상 ‘반관ㆍ반민’ 성격 탓에 보조금 지급(민간 기업 특혜)이든, 추가 출자(국유화)든 논란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 에너지정책학과 교수는 “국제 에너지 가격 상승에 맞춰 탄력적으로 전기료를 조정했어야 지금 같은 적자 누적을 막을 수 있었는데 진보ㆍ보수를 막론하고 지금껏 정부는 이를 회피하기만 했다”며 “지금 정도 손실 규모면 요금 인상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전기료 인상으로 재무 위기를 넘겨도 장기 과제는 남는다. 전력 생산비를 줄이는 방안을 찾을 필요가 있다는 게 전문가들 제언이다. 액화천연가스(LNG)나 석유 같은 고가의 발전원을 대체할 수 있는 태양광ㆍ해상풍력 등 신재생에너지 개발에 더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존 원자력발전소 활용과 차세대 소형 모듈 원전 투자가 안전성이나 폐기물 문제에 수출까지 염두에 둔 현실적 대안이라는 목소리도 없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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