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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신용은 무한하지 않다

입력
2022.11.15 00:0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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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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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안의 물통에서 물을 한 바가지 퍼내면 물이 그만큼 줄어드는 게 확연히 보인다. 그런데 마을에서 공용으로 사용하는 대형 물탱크에서 물 한 바가지를 퍼내면 거의 티가 나지 않는다. 물이 그대로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공용 물탱크의 물을 쓰면 물이 없어지지 않는 것인가? 그래서 집 안의 물은 아껴 써야 하지만 공용 물탱크의 물은 무한정이니까 마음대로 써도 되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 사람들 대부분은 대답할 가치조차 없는 멍청한 질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작은 물통의 물이건 대형 물탱크의 물이건 동일한 양의 물을 사용하면 그만큼의 물이 없어진다. 다만 대형 물탱크는 워낙 수량이 많고 수면이 넓어 수위가 줄어드는 것을 눈으로 인지하지 못할 뿐이다. '마을 공용의 물은 무한하다'는 생각 아래 마음대로 퍼 쓰다간 머지않아 물탱크가 바닥을 드러낼 것이고, 물을 다시 채워야 하는 문제에 직면할 것이다. 마을에서 이용 가능한 수원은 한정되어 있는데 공용 물탱크의 물을 엉뚱한 곳에 써버리고 나면 정작 필요한 곳에 쓰일 물은 부족해질 것이다. 만약 가뭄이라도 든다면 마을 전체가 심각한 물 부족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마을 공용 물탱크 물도 아껴 써야 하고 함부로 불필요한 곳에 쓰지 못하게 철저히 감시도 해야 한다.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금융에서 돈을 끌어 쓰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개인은 돈을 함부로 빌려 쓰면 금방 신용이 나빠져서 높은 이자를 물어야 하고 돈을 빌리기도 힘들어진다. 기업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국가 재정은 개인이나 기업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규모가 크기 때문에 대량의 부채를 지고도 높은 국가신용도를 유지할 수 있다. 대한민국은 2010년대 중반 이후 매우 높은 신용등급인 Aa2(무디스 기준)를 유지하고 있으며, 중앙정부뿐만 아니라 정부가 명시적 또는 암묵적으로 지급을 보증하는 지자체나 공기업들도 동일한 수준의 신용도를 누리고 있다. 정부가 수천억 원대의 국채를 추가로 발행한다고 해도 우리나라의 국가신용도가 쉽게 흔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마을 공용 물탱크와 마찬가지로 정부의 신용은 무한정 퍼 쓸 수 있는 공짜 자원이 아니다. 표시가 나지 않는다고 여기저기에 함부로 가져다 썼다간 졸지에 나라 전체의 신용이 바닥을 드러낼 수 있다. 그런데 아직도 정부 신용은 무한한 것처럼 생각하고 최대한 당겨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규모 자본투입이 필요한 재생에너지 발전사업을 민간에 맡기는 것보다 공기업이 담당하는 것이 이자비용을 절감할 수 있어서 더 유리하다는 주장이 전형적이다. 누가 돈을 빌리든 그 사업의 경제성은 동일한데 정부신용이라는 막대한 물탱크를 이용하면 금융비용을 낮출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당장 낮은 비용으로 돈을 빌릴 수 있다 보니 타당성이 낮은 사업이나 선심성 행정에 나랏돈을 투입하려는 유인이 강해진다는 것이다.

사업성을 제대로 검토하지도 않고 지자체가 보증한 빚으로 진행한 레고랜드 사업이나 한전에 수십조 적자가 쌓이는 걸 뻔히 알면서도 요금 정상화 대신에 채권 발행으로 계속 돌려 막으려는 발상이 그 예이다. 이런 실패 사례는 국가신용의 남용이 어떻게 경제적 의사결정을 왜곡하고 금융시장을 교란하며 국가신용도를 위협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김영산 한양대 경제금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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