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부터 최고의 경기 북부 무역항으로 꼽혀
6·25전쟁 포격으로 마을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연천군 "각종 규제부터 풀어달라고 요청할 것"
지난달 25일 오후 경기 연천군 임진강 장남면 고랑포리 964번지. 저녁 노을에 비친 독특한 모양의 주상절리 절벽이 임진강과 어우러져 절경을 뽐냈다. 하지만 철책선과 민간인 출입통제선 경계에는 총을 든 군인만 눈에 띌 뿐 인기척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을씨년스러웠다. 콘크리트 구조물의 선착장과 덩그러니 떠 있는 배 한 척이 과거 이곳이 포구였다는 사실을 짐작케 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1945년 해방 직전까지 경기 북부권에서 최대 무역항으로 꼽히는 고랑포구가 자리했다. 서울과 개성을 잇는 중요한 교통 요충지로, 일제강점기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백화점인 화신백화점 분점이 고랑포구에 들어섰다. 하지만 6·25 전쟁을 기점으로 급격히 쇠락한 고랑포구의 모습은 이제 남겨진 자료를 통해서만 추정이 가능하다.
5년 전 복원사업 규제로 제동...재추진 나선 연천군
연천군이 과거 고랑포구 영광 재현에 시동을 걸었다. 70년 전 옛 포구 모습을 복원해 관광 자원화하겠다는 구상이다. 지난 2일 김덕현 연천군수는 “지역 경제와 관광 활성화를 위해 스토리가 풍부한 옛 고랑포구의 모습을 복원하겠다”며 “정부에 규제 완화를 호소하겠다”고 말했다. 연천군은 이미 지난 2017년 고랑포리 4만6,521㎡에 ‘고랑포구 역사공원’을 개장했다. 당시 연천군은 포구 정비 사업을 통해 황포돛배를 띄우는 등 옛 포구의 모습을 재현하려고 했으나, 각종 규제로 꿈을 접었다.
복원사업이 중단된 지 5년이 지났지만 고랑포구 복원사업만 한 관광자원도 없다는 게 연천군의 판단이다. 김후림 연천군 문화관광해설사는 "고랑포구는 삼국시대부터 6·25전쟁 전까지 남북 내륙과 서해안 바닷길을 잇는 한수 이북 최대의 무역항이었다"며 “배에 옮길 작물이 포구 앞에 2㎞나 대기할 정도로 번성했다"고 말했다.
강 상류인 강원 철원과 경기 양주, 황해도 등에서 생산된 콩과 율무 등 농산물을 서울 마포 등으로 보내거나, 서해안에서 생산된 새우젓과 소금 등을 임진강 북쪽 지역으로 실어 나르는 데 꼭 거쳐야 하는 곳이 고랑포구였다. 윤미숙 연천군 학예사는 “고랑포구는 서해안 밀물과 썰물의 영향이 미치는 끝지점으로, 이를 통해 돛배가 움직였다”며 “삼국시대에는 평양~개성~서울로 이어지는 최단 거리 길목이라 포구가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특히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부터 1940년대 사이 고랑포구 주변은 잡화점과 전문 어물점과 포목점들이 번창하는 등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서울 화신백화점이 3층짜리 분점을 내고 영업을 할 정도였다. 당시 하루 최대 30여 척의 선박이 고랑포구를 드나들었다. 1930년대 이후 포구가 있는 장남면 인구는 현재 연천군 전체 인구(4만3,236명)의 70%에 이르는 3만 명 정도였다.
남북분단 역사만큼 묻힌 고랑포구 흔적
하지만 수백 년간 한수 이북 지역의 요충지 역할을 했던 고랑포구는 1945년 해방 이후부터 쇠락했다. 포구 북쪽 3㎞에 38선이 그어지며 북쪽 사람들의 왕래와 물자 교류가 끊겼다. 6·25 전쟁 때는 포격으로 마을 전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후에도 휴전선이 확정되면서 고랑포구 주변은 황량한 터만 남게 됐다. 남북분단의 아픈 역사 만큼이나 고랑포구의 흔적은 과거에 잠겨 있던 셈이다.
연천군은 이전 연구용역 결과 등을 토대로 복원 밑그림을 마련 중이다. 철책으로 둘러싸인 포구 개방을 위해 군과 협의도 진행 중이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화신백화점 복원을 위해 옛 기록도 수집 중이다. 연천군은 특히 삼국시대부터 이어 온 고랑포구의 역사성을 살릴 계획이다. 연천군 관계자는 “고구려 3대 성터인 호로고루성과 당포성, 은대리성를 복원한 뒤 고랑포구와 연계해 연천의 대표적인 역사 관광 명소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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