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째 산삼 심는 사람들 ‘농심마니’
“참나무 같은 활엽수 아래나 바위 옆 물이 잘 빠지는 곳에 심어야 합니다. 햇볕과 그늘이 적당히 드는 곳이 좋죠. 심은 다음엔 잘 밟아 주세요. 한 뿌리는 드셔도 됩니다. 하하.”
지난달 30일 경기 양평군 강하면 산기슭. 곱게 물든 낙엽이 뚝뚝 떨어지는 가을 숲속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묘삼(어린 산삼 뿌리)을 심는 요령을 들은 후 이내 산속으로 흩어졌다. 이들은 매년 봄(4월) 가을(10월) 두 차례 전국의 산야를 돌며 산삼을 심는 ‘농심마니’(회장 최유진) 회원들이다. 1987년부터 시작했으니 올해로 35년째다.
이 모임은 김용태 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이사장(2014년 작고), 산악인 박인식, 작곡가 한돌, 소설가 최성각, 연극연출가 최유진, 이덕영 발해뗏목탐사대 선장, 화가 박권수(2005년 작고)씨 등이 모여 결성했다. 국내 첫 인삼재배지인 전남 화순 모후산에 처음 산삼을 심은 후 전국 방방곡곡을 돌았다. 현재 회원은 정치인, 기업인, 문화예술인 등 300여 명에 이른다.
코로나19 때문에 작년과 재작년에는 중단됐다가 3년 만에 모이는 자리라 그런지 이날 온 사람들은 유난히 신바람이 난 듯했다. 올해 행사에는 인사동 문화예술계 인사 20여 명도 합류했다.
“심마니가 삼을 캐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삼을 심고 다닌다는 의미에서 농사지을 농(農)자를 넣어 ‘농심마니’라고 칭했습니다. 전국을 돌며 수만 뿌리의 묘삼과 수십만 개의 산삼 씨앗을 심었지만 캐러 간 적은 한번도 없어요.”
‘농심마니’ 창설 멤버이자 최근 3대 회장을 맡은 최씨의 설명이다.
이날 심은 묘삼은 새끼손가락 정도 두께에 길이는 7, 8㎝쯤 이르는 것으로 모두 400여 주다. 회원들은 대여섯 뿌리씩 받아 들고 나뭇가지로 땅을 파서 정성껏 심었다. 이렇게 심어도 잘 자랄까 싶지만 산삼은 생명력이 강해서 쉽게 죽지 않는다고 한다. 생육 여건이 좋지 않아도 몇 년씩 잠을 자다가 싹을 틔운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씨로도 뿌렸지만 올해는 묘삼으로만 심었다. 이 묘삼은 강원도 속초에서 3대째 심마니인 박재영씨가 캤던 산삼 가운데 상품성이 떨어지는 것만 모아 둔 것. 박씨는 첫 행사부터 지금까지 묘삼 수만 주를 기증해 왔다.
이날 산삼 심기 행사에는 배우 겸 연출가인 기국서, 사진작가 조문호, 도예가 황예숙, 시인 백남희, 이성 전 구로구청장, 김명성 아라아트 대표, 이미란 발효학교 대표이사, 화가 강찬모, 배우 이명희·나자명, 무용감독 김성은, 영화제작자 오치우씨 등이 참여했다. 최근 별세한 만화가 고 박기정 화백과 고 황명걸 시인도 원래 주축 멤버였다. 이날 참석하지 않았지만 소리꾼 장사익, 가수 최백호, 개그맨 전유성씨도 열성회원이다.
최 회장은 “산삼은 예로부터 산신령이 주는 영험한 약초라고 믿는 민속신앙이 있었다"며 "우리가 산삼을 심는 것은 산삼의 영험으로 산하가 잘 보존되게 하고, 산삼을 먹은 사람들이 건강을 되찾도록 하는 일종의 생태환경운동”이라고 소개했다.
20여 년 전 서울시 고위 간부 시절부터 이 모임에 참여해 온 이성 전 구청장은 “한때 우리나라 산에서 산삼이 멸종되다시피 했으나 농심마니 덕분에 산삼이 많이 늘었다”고 자랑했다. 실제로 최근에 산삼을 캤다고 알려진 지역 가운데 상당수가 이 회원들이 묘삼을 심었던 곳이라고 한다.
그가 서울시 경쟁력본부장이던 2009년 봄에는 100여 명의 농심마니가 남산에서 산삼 심기 행사를 펼쳐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당초 서울시 푸른도시국이 남산에 산삼 심는 것에 대해 반대했지만 당시 오세훈 서울시장을 만나 ‘전국 주요 산에 심는데 남산이 빠지면 안 된다’고 설득해 허락을 받아냈다.
그에겐 요즘 다른 고민이 생겼다. 산삼 심기 행사가 입소문을 타고 알려지면서 이젠 산삼 심어 놓은 산을 찾아가는 산악회 버스까지 등장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서는 산삼을 심는 속도보다 캐는 속도가 빨라져 조만간 멸종되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앞으로는 산삼 지키기 운동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양평=글·사진 최진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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