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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의 힘'에 길들어... 마다가스카르는 "러시아 편"

입력
2022.10.22 05:00
수정
2022.10.22 08:40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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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유엔 긴급특별총회에서 회원국 대표들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점령지 불법 병합을 규탄하는 결의안에 대해 표결하고 있다. 결의안은 찬성 143표, 반대 5표, 기권 35표로 가결됐다. 뉴욕=EPA 연합뉴스

12일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유엔 긴급특별총회에서 회원국 대표들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점령지 불법 병합을 규탄하는 결의안에 대해 표결하고 있다. 결의안은 찬성 143표, 반대 5표, 기권 35표로 가결됐다. 뉴욕=EPA 연합뉴스

인도양 섬나라 마다가스카르에서 외무장관이 해임됐다. 현지 언론 마다가스카르트리뷴은 18일(현지시간) 리샤르 란드리아만드라토 외무장관의 모든 일정이 취소되더니 대통령의 결정에 따라 전격 해임됐다고 보도했다.

이 나라에서는 자주 있는 일이다. 2019년 안드리 라조엘리나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로 외무장관이 4번 바뀌었다. 하지만 이번 해임은 늘 있어 온 정치 다툼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유엔 총회에서 대통령과 총리의 승인 없이 러시아를 규탄하는 결의안에 찬성했다가 물러난 것이기 때문이다.

이달 12일 유엔 총회에서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동부 4개 지역(도네츠크ㆍ루한스크ㆍ자포리자ㆍ헤르손)에서 실시한 ‘주민투표’를 명분 삼아 이 지역들을 합병하려 하는 것을 규탄하는 결의안이 표결에 부쳐졌다. 143개국이 찬성표를 던졌고 란드리아만드라토 장관도 동참했다. 그리고 며칠 만에 해임됐다.

대통령은 사유를 밝히지 않았지만, 란드리아만드라토 장관은 외국 언론과 인터뷰를 하면서 “유엔 결의안 때문”이라고 말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마다가스카르는 ‘러시아ㆍ우크라이나 분쟁’에서 ‘중립적인 입장’이며 우크라이나 위기와 관련된 결의안 투표 때 매번 기권했다.

마다가스카르 정치권에도 손뻗은 푸틴

안드리 라조엘리나 마다가스카르 대통령이 9월 21일 유엔총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뉴욕=로이터 연합뉴스

안드리 라조엘리나 마다가스카르 대통령이 9월 21일 유엔총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뉴욕=로이터 연합뉴스

마다가스카르에서는 2009년 마르크 라발로마나 당시 대통령이 강압적 통치로 국민들의 거센 저항에 부딪혀 쫓겨나며 정치적 위기가 발생했다. 한국 기업이 이 나라 농지의 절반을 헐값에 임대하는 계약을 한 것도 위기의 한 원인이었다. 그때 러시아의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무장관이 “아프리카의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무력 사용을 우려한다”며 마다가스카르 정부의 시위 유혈진압을 비판한 것은 지금 돌아보면 웃지 못할 코미디다.

정권이 축출된 뒤 기업인 출신 라조엘리나 현 대통령이 2014년까지 5년 동안 군을 등에 업고 임시 대통령을 맡았다. 이후 수도 안타나나리보 시장을 지내다가 2018년 대선에서 이기고 이듬해 취임했다. 그에 대한 평가는 그리 좋지 않다. 코로나19 팬데믹 속에서 비과학적인 치료법을 주장했고, 2021년 극심한 가뭄으로 ‘기후변화 기근’이 닥쳤을 때, 사이클론이 강타했을 때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비난을 받았다.

라조엘리나와 러시아의 밀착관계는 4년 전 대선 때부터 두드러졌다. 미국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러시아 공작원들이 마다가스카르 거리에서 ‘현금이 가득한 배낭’을 들고 다니며 언론과 유권자들에게 공공연히 뇌물을 뿌렸다. 당시 기사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측근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마다가스카르 대선에 영향을 미친 정황이 소개돼 있다.

러시아 뉴스를 보아온 사람에게는 낯설지 않은 '프리고진'이 여기서 다시 등장한다. 케이터링 회사를 운영하면서 ‘푸틴의 셰프’라 불렸던 사람이다. 미국의 제재를 오랫동안 받고 있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을 개시하기 직전 유럽연합(EU)도 제재 대상에 올린 인물이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선 ‘인터넷연구대행사’라는 러시아의 수상쩍은 조직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유리한 가짜뉴스를 퍼뜨렸는데, 그 조직을 운영한 사람이 그였다. 시리아 내전 때 러시아는 독재 정권을 지원했고 바그너라는 민간군사회사가 용병들을 시리아에 보냈다. 최근 10년간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친러시아 민병대’를 자처하며 분란을 일으킨 것도 바그너의 용병들이다. 이 회사도 프리고진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그가 마다가스카르에까지 팔을 뻗치고 있었던 것이다.

국제사회 고립 러시아, 아프리카서 우군 포섭 공작

지난해 40년 만에 닥친 최악의 가뭄으로 마다가스카르 남부에서 110만 명이 기근에 시달렸다. 유엔세계식량계획 홈페이지 캡처

지난해 40년 만에 닥친 최악의 가뭄으로 마다가스카르 남부에서 110만 명이 기근에 시달렸다. 유엔세계식량계획 홈페이지 캡처

마다가스카르는 아프리카 동부 해안에서 400㎞ 떨어진 섬나라다. 면적이 58만㎢로 세계에서 4번째로 큰 섬이고, 국가 기준으로 보면 인도네시아에 이어 세계에서 2번째로 큰 섬나라다. 오랫동안 생태계가 고립돼 진화했기 때문에 생물다양성이 풍부한 것으로 유명하다.

자연 다큐멘터리에 곧잘 등장하는 곳이지만 정작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상황이 좋지만은 않다. 원래 토착민은 오스트로네시아계와 아시아 쪽에서 온 섬사람들이었지만, 9세기쯤 아프리카에서 반투족 이주자들이 건너 가 정착했다. 부족 단위로 흩어져 있다가 19세기 초 메리나 고원지대 엘리트들이 전국을 장악하면서 마다가스카르 왕국으로 통합됐다. 왕국은 100년이 못 갔고 1897년 프랑스 식민지가 됐다. 1960년 독립했지만 지금도 토착언어인 말라가시어와 프랑스어를 함께 쓴다.

생태관광과 농업을 주요 산업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2020년 1인당 실질 국내총생산(GDP)이 1,500달러에 불과한 최빈국이다. 2,800만 명의 인구 가운데 대다수가 빈곤선 아래에서 살고 있고, 정치 위기, 기후 재앙과 팬데믹이 겹치면서 경제 사정은 근 몇 년 동안 계속 나빠졌다. 석탄, 석유, 천연가스는 나오지 않고 전기를 쓸 수 있는 인구가 40%에도 못 미친다. 2000년부터 미국이 면세 혜택을 준 덕에 섬유제품을 수출하며 경제가 성장했지만, 미국의 지원 조치는 10년 만에 끝났다. 2014년 정권이 축출되기 전까지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은 마다가스카르를 상대로 ‘민영화와 자유화’ 정책을 강요했다. 결국 GDP는 11%나 줄었고 외화 수입은 지금껏 바닐라 수출에 의존하고 있다.

러시아는 왜 이 나라에 관심을 기울여 왔을까. 크렘린과 마다가스카르의 수상한 관계를 알려주는 자료가 2019년 폭로됐다. 푸틴에게 밉보여 영국 런던으로 망명한 러시아 기업가 미하일 호도르콥스키가 후원하는 단체가 정보를 입수했고, 영국 신문 가디언이 받아서 공개한 것이다. 당시 폭로된 문건을 보면 러시아는 아프리카 10여 개국 정권과 밀착 관계를 구축하고 군사협정을 맺었다. 냉전이 끝난 뒤 아프리카에 대한 관심을 접었던 러시아가 2014년 크림반도 병합 뒤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자 아프리카에서 ‘우군 만들기’에 나선 것이었다. 미국이 2007년 ‘아프리카사령부’를 만들어 군사기지를 늘린 것이 러시아를 자극한 측면도 있다.

군사 지원받은 아프리카, 푸틴 외면 어려운 ‘딜레마’

2010년 9월 20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외곽에 위치한 급식 공장에서 촬영된 사진으로, 당시 총리였던 블라디미르 푸틴(왼쪽) 현 대통령에게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생산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자료사진

2010년 9월 20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외곽에 위치한 급식 공장에서 촬영된 사진으로, 당시 총리였던 블라디미르 푸틴(왼쪽) 현 대통령에게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생산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자료사진

러시아의 아프리카 작업을 물밑에서 주도한 것은 역시나 프리고진이었다. 러시아 정부의 비호 아래 바그너 용병들이 들어가 아프리카 국가의 정권을 지킬 병력을 훈련시켰다. 사하라사막 남쪽의 내륙 국가인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은 북부 이슬람 지역과 남부 기독교 지역으로 갈라져 내전이 일어났는데, 바그너 용병과 러시아 군인들이 ‘평화 유지’ 명목으로 배치됐다. 아프리카 중부에 드넓은 땅을 가진 콩고민주공화국에도 러시아 군사 전문가들과 무기가 들어갔다. 수단에서는 남부 소수민족을 학살해 국제사회의 지탄을 받은 오마르 알 바시르 대통령을 러시아가 정치적, 경제적으로 밀어줬다. 프리고진의 수하들은 인도양의 또 다른 섬나라 코모로를 찾아가 프랑스와의 갈등을 부추겼다.

러시아는 2019년 첫 ‘러시아ㆍ아프리카 정상회의’를 열었고 ‘범아프리카의 자각’을 일깨우려는 선전전도 계획했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세계의 이목을 끈 ‘러스키 미르’, 즉 러시아를 중심에 둔 푸틴 세계관의 복제판이었다. 모로코에 본사를 둔 웹사이트 ‘아프리카 데일리보이스’, 마다가스카르에서 운영되는 프랑스어 뉴스서비스 ‘아프리카 파노라마’ 등이 러시아의 선전 도구로 설계됐다. 다만 ‘프리고진 이니셔티브’로 불린 이런 프로파간다 작업들이 실제로 얼마나 진척됐는지는 불투명하다.

러시아는 협력 수준에 따라 아프리카 국가들에 등급을 매겼다. 마다가스카르는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수단과 함께 협력 수준이 ‘최고’인 나라들로 표시됐다. 2019년 폭로 문건은 라조엘리나가 대선에 승리한 것이 ‘회사(바그너)의 지원’에 힘입은 것임을 명시했다. 러시아는 발행부수가 200만 부에 이르는 마다가스카르 최대 신문을 후원하며 여론을 조작했다고 한다. 처음에 러시아는 6명의 대선후보에게 고루 손을 내밀었다가 막판 판세를 보고 라조엘리나에게 지원을 몰아줬고 이것이 먹혀들었다. 마다가스카르는 사회주의 성향의 정부가 집권했다가 1992년 무너진 뒤 서방 쪽으로 기울었는데 러시아가 다시 영향력을 강화할 기회를 잡은 것이다.

라조엘리나는 크렘린의 후원에 적극 호응한 것으로 보인다. 우크라이나 침공 뒤에도 마다가스카르는 러시아와의 군사협력을 강화했다. 올해 3월 말 두 나라는 5년 단위의 군사협력협정을 갱신했는데 마다가스카르의 무기 구입과 군수품 개발, 군 장병 훈련과 장비 유지를 러시아가 돕는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라조엘리나 정부는 “우리는 모든 나라와 협력한다”며 중립을 내세웠지만 마다가스카르는 결국 신냉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버렸다.

최근 유엔 투표에서 사우디아라비아, 벨라루스, 북한, 시리아, 니카라과 등 35개국이 러시아를 비난하는 결의안에 찬성하지 않았는데, 이 중 절반이 아프리카 국가들이었다. 아프리카에서 26개국은 찬성했고 18개국은 반대했으며 4개국은 기권했다. 이를 보면 푸틴의 아프리카 투자는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힘을 앞세운 열강들에 수탈당한 역사의 피해자로서 ‘지구적 부정의’를 비난하며 배상을 요구해온 마다가스카르와 아프리카의 이런 행보는 씁쓸하기만 하다.


구정은 국제 전문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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