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상담사에 실컷 욕해놓고 "혼잣말인데?"…역할 못하는 '감정노동자 보호법'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상담사에 실컷 욕해놓고 "혼잣말인데?"…역할 못하는 '감정노동자 보호법'

입력
2022.10.18 14:00
수정
2022.10.18 14:12
0 0

오늘 시행 4년 맞은 '감정노동자 보호법'
콜센터 노동자 작업중지권 등 보장 안 돼
"정부, 감정노동 사업장 일제 점검해야"

18일 서울 중구 민주노총에서 열린 감정노동자 보호법 시행 4년 콜센터 감정노동 실태 증언 기자회견에서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전화상담 업무를 하는 곽은선 국민건강보험고객센터지부 부산지회 총무부장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18일 서울 중구 민주노총에서 열린 감정노동자 보호법 시행 4년 콜센터 감정노동 실태 증언 기자회견에서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전화상담 업무를 하는 곽은선 국민건강보험고객센터지부 부산지회 총무부장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4년 전 오늘 '감정노동자 보호법'으로도 불리는 개정 산업안전보건법이 시행됐다. 감정노동자 보호의 책임을 사업자에게 지우겠다는 법이었지만, 올해 3월 국가인권위원회의 조사에서 콜센터 상담사들은 매달 폭언은 평균 11회, 성희롱은 1회 이상 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8년과 비교하면 폭언은 약 62%, 성희롱은 약 14% 오히려 늘었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는 18일 서울 중구 민주노총에서 '감정노동자 보호법 시행 4년, 콜센터 감정노동 실태 증언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날 기자회견에 나선 콜센터 노동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감정노동자가 고객의 폭언으로부터 '피할 권리'가 제대로 보장되어 있지 않아 법의 보호 규정은 여전히 그림의 떡으로 남아 있었다.

①욕설 후 '혼잣말'이라면 대응 불가?

감정노동자 보호가 법에 명시된 이후에도 콜센터 상담사들에 대한 폭언, 성희롱 등은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감정노동자 보호가 법에 명시된 이후에도 콜센터 상담사들에 대한 폭언, 성희롱 등은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시XX이 말귀 XX 못 알아듣네."

서울신용보증재단 고객센터에서 일하던 윤민아씨가 올해 7월 고객에게서 들은 말이다. 이 경우 윤씨는 바로 전화를 끊을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대부분 콜센터에서는 고객의 욕설 시 '응대가 제한될 수 있다'라고 1차로 상담사가 직접 자제요청을 하도록 한다. 이후로도 욕설이 계속된다면 법적 조치를 경고하는 자동응답시스템(ARS)을 2차, 3차에 거쳐 내보낸 후에야 자동으로 통화가 종료된다. 여러 번의 욕설을 듣고 절차를 밟아야 비로소 상담 중단이 가능한 셈이다.

정용재 공공운수노조 부위원장은 이날 토론회에서 "성희롱, 폭언 상황에서 피해노동자의 작업중지권이나 전화 끊을 권리를 초기 단계에서 가능하도록 해야 하지만 3회까지 경고하게 하는 콜센터가 다수"라고 했다.

아울러 고객이 "당신에게 한 욕이 아니다"라고 대응하는 경우 ARS 송출이 어렵다. 곽은선 국민건강보험고객센터지부 부산지회 총무부장은 "욕설의 경계가 모호하고, 고객이 상담사를 상대로 한 욕설이 아닌 혼잣말이라고 할 때도 있어 경고 안내 버튼을 누르기 애매하다"라고 했다.

②'콜 수' 채워야… 휴식권 보장 안 돼

한 콜센터 상담사가 김관욱 교수에게 제공한 평가표. 상담사의 월급은 업무량과 질에 따라서 다르게 지급된다. 평가는 통화를 녹음해 이뤄지는데 민원인 신원을 확인하고 내용을 제대로 전달했는지뿐만 아니라 언어 표현부터 상황 대응 능력, 발음, 억양 등도 평가한다. 창비 제공

한 콜센터 상담사가 김관욱 교수에게 제공한 평가표. 상담사의 월급은 업무량과 질에 따라서 다르게 지급된다. 평가는 통화를 녹음해 이뤄지는데 민원인 신원을 확인하고 내용을 제대로 전달했는지뿐만 아니라 언어 표현부터 상황 대응 능력, 발음, 억양 등도 평가한다. 창비 제공

'콜이 밀리는 순간 센터에서 노래가 나온다. 한 다섯콜 밀리면 센터장 자리에서 띵띠 띠리리리 띵띠 띠리리리 소리가 (자동으로) 나온다.'

콜센터 노동자들을 심층 인터뷰한 내용을 담은 연구서 '사람입니다, 고객님'에 나온 콜센터의 풍경이다. 산업안전보건법 제41조는 '사업주는 고객응대 근로자가 폭언 등을 들었을 때 업무의 일시 중단 혹은 전환 등 필요한 조치를 하여야 한다'라고 명시해 뒀다. 그러나 상담사가 처리하는 콜 수를 늘리기 위해 이런 시스템으로 감시하고 평가하는 환경에서 콜 수를 채워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은 아무리 폭언을 듣더라도 감히 쉴 엄두를 내지 못한다.

김승진 LG헬로비전콜센터지부장은 "응대해야 할 콜 목표가 있으니 휴식을 하게 되면 목표 달성에 문제가 생긴다"면서 "실적을 달성하지 못하면 팀에 피해를 주고 실적 저조자로 압박받게 된다"라고 현실을 전했다. 곽 총무부장 역시 "콜 수로 이뤄지는 평가와 보상 때문에 생계가 달린 상담사들은 폭언을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다"라고 했다.

폭언을 들은 콜센터 노동자가 휴식을 취하고자 하는 경우 관리자의 승인이 필요해 몸을 사린다는 지적도 나왔다. 김 지부장은 "관리자가 해당 통화를 듣고 휴식이 정당한지를 판단, 때에 따라 질책도 받는다"라고 말했다.

③사업장 따라 보호는 천차만별

민주노총 전국공공운수노조 조합원과 콜센터 노동자들이 18일 서울 중구 민주노총에서 열린 감정노동자 보호법 시행 4년 콜센터 감정노동 실태 증언 기자회견에서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민주노총 전국공공운수노조 조합원과 콜센터 노동자들이 18일 서울 중구 민주노총에서 열린 감정노동자 보호법 시행 4년 콜센터 감정노동 실태 증언 기자회견에서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감정노동자 보호법은 시행 이전부터 강제성이 없어 한계를 지닐 것이란 전망이 나왔다. 사업주에게 감정노동자 보호 의무를 부과했지만, 이를 지키지 않아도 처벌할 벌칙 규정은 없어 오롯이 사업주의 선의에 기대야 한다는 지적이었다.

이런 지적은 4년 후 현실이 됐다. 강제성이 없는 만큼 사업장마다 보호의 수준은 천차만별이다. 최윤희 경기도콜센터지부 사회연대부장은 "A공공기관 민간위탁 콜센터에는 고객의 폭언을 응대한 상담사들에게 정해진 휴게시간 외 추가 휴게시간 연장이 가능하다는 공지가 없었다"며 "감정노동 보호 관련 교육 시에도 언급조차 안 했고 알음알음 센터장에게 요청을 해야 보장할 수 있다고 한다"고 전했다. 반면 최 부장이 몸담은 120경기콜센터의 경우 악성·강성 민원 처리기준을 마련했고, 상담사 보호에 관한 운영지침도 세워 뒀다.

법에 원청에 대한 의무사항이 없다는 점도 구속력을 약하게 만든다. 콜센터 노동자는 약 20% 안팎(인권위 조사·2021)만 직접고용되어 있다. 신명숙 다산콜센터 지부장은 "하청은 자체적인 판단으로 민원인을 차단할 권한이 없다"면서 "민원인이 상담사가 하청이라는 사실을 알고 '너 소속이 어디냐'라면서 괴롭히기도 한다"고 전했다.

이날 참석자들은 감정노동 사업장의 일제 점검 및 산업안전보건 분야 근로감독이 필요하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김민경 공공운수노조 법률원 변호사는 "고용노동부는 특별근로감독 등으로 사업주가 법을 제대로 지키는지 점검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아울러 △불량 고객에 대한 상담서비스 중단 규정 신설 △감정노동 보호 원청 직접 책임 법제화 △콜센터 산업의 안전보건관리체계 마련 등을 요구했다.

전혼잎 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