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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합의 수난사

입력
2022.10.16 18:0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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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문재인(오른쪽) 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평화의집에서 열린 환영만찬에서 건배하고 있다. 판문점=고영권 기자

문재인(오른쪽) 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평화의집에서 열린 환영만찬에서 건배하고 있다. 판문점=고영권 기자

6·25전쟁 이후 첫 남북 합의는 ‘7·4공동성명’이다. 올해로 꼭 50년, 반세기가 됐다. 1972년 7월 4일 오전 10시를 기해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됐다. 그해 5월부터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북한의 제2부수상 박성철이 평양과 서울을 비밀리에 서로 방문,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이라는 통일 3원칙을 세웠다. 이후락이 ‘일이 잘못되면 자결하겠다’며 청산가리 캡슐을 숨겨 방북한 일화도 전해졌다. 정작 남쪽은 박정희 유신체제, 북쪽은 김일성 유일체제가 등장했다. 화해 분위기도 1976년 8월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으로 종식됐다.

□ 이후 가장 중요한 문건은 1991년 ‘남북 기본합의서’다. 서문과 4장25조로 분야별 추진과제를 총망라했다. 이 합의서는 남북관계를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로 정의했다. 당시 냉전해체, 한국의 북방정책 성과, 북한체제의 위기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도 이뤄졌다. 기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북한의 핵개발이란 핵심 배경을 두고 이미 북미대화가 상수였기 때문이다.

□ 남북관계는 김대중 대통령 취임 후 새 국면을 맞는다. 1997년 대선 직전 새정치국민회의 일각에선 “김구와 김대중 선생을 존경한다며 남한 군사정권을 공격해온 북이 향후 화해국면을 거부하기 힘들 것”이란 흥미로운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급기야 2000년 6월 평양에서 역사적인 첫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다. 주춧돌이 세워지자 그해 10월 북미공동코뮈니케, 2002년 북일정상회담, 2005년 6자회담 9·19공동성명, 2007년 10·4선언이 이어졌다.

□ 1989년 11월 베를린장벽 붕괴 이후 이때처럼 지구촌이 들썩인 적도 없을 것이다.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미국 대통령과 북한 최고지도자가 마주했다. 세계사적 담판은 그러나 이듬해 2월 하노이 2차회담이 ‘노딜’로 끝나면서 빛이 바랬다. 화려한 문재인 정부의 최대 대북성과로 꼽히는 ‘9·19 남북군사합의’도 최근 계속되는 북한 도발로 퇴색했다. 북한의 시위에도 바이든 미 대통령은 꿈쩍도 안 하고 있다. 고비를 넘길지, 한국 내 보수여론이 어디까지 인내할지 9·19 합의는 ‘바람 앞 촛불’ 같은 처지다.

박석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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