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유골 발굴한 도노히라 스님 인터뷰
홋카이도서 가혹한 다코베야 노동 실상 전해
"사과하고 용서해야 한일 관계 회복"
일제강점기 강제 동원돼 일본 홋카이도에서 중노동을 하다 숨진 조선인의 유골 115위가 지난 2015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70년 만의 귀향’이 있기까지는 도노히라 요시히코 스님(동아시아시민네트워크 공동대표)을 비롯한 일본 시민들의 헌신적 노력이 있었다.
도노히라 스님은 1976년 홋카이도의 고켄지라는 절에서 일본인과 조선인 노동자의 위패 80기를 처음 발견해 유골 발굴 작업을 시작했다. 1995년에 이 절을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과 위패, 유물 등을 전시하는 ‘사사노보효(笹の墓標)’ 전시관으로 바꾸어 개관했다.
이 전시관이 지난 2020년 2월 폭설로 무너졌다. 재건 비용 모금을 위해 도쿄 쓰키지혼간지에서 지난 5일부터 열리고 있는 전시회를 12일 찾아, 도노히라 스님으로부터 홋카이도 강제노역의 실상을 들었다.
-처음 조선인 강제동원 노동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재일조선인 채만진씨 등에게 직접 겪은 강제노동의 체험을 듣고 조사에 나섰다. 채씨는 가혹한 ‘다코베야(タコ部屋·문어방, 강제노동 수용소를 가리킴) 노동’ 중 탈주했다가 잡혀 집단 폭행을 당하는 등 여러 차례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는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 동료를 위해, 동포를 위해, 이웃을 위해 하는 일은 언젠가 반드시 자신에게 돌아온다’고도 했다. 이 말로 인해 오늘까지 운동을 계속해 올 수 있었다.”
-다코베야 노동에 대해 설명해 달라.
“메이지 시대 초기 홋카이도 개척 당시부터 있던 강제노동 형태다. 도로, 철도 등 각종 인프라 건설을 위해 처음엔 죄수를 데려왔다. 메이지 중기부터는 타지역 사람들을 감언이설로 속여 홋카이도에 데려온 뒤 유흥으로 빚을 지게 하고 팔아넘겼다. 많은 일본인이 다코베야에서 감금당한 채 중노동과 영양실조에 시달렸다. 사망자도 많았다. 태평양전쟁 때 일본인이 징병돼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식민지 조선인을 강제 동원했다. 이들도 24시간 감시당하며 중노동을 했다. 도망치면 잡아다 본보기로 집단폭행했다.”
-한일 젊은이들의 유골 발굴 활동이 궁금하다.
“사사노보효는 전시공간일 뿐 아니라 한일 양국 젊은이들이 함께 유골을 발굴하고 역사를 배우고 토론하는 장이기도 하다. 1997년부터 정병호 한양대 교수(평화디딤돌 이사장)와 공동으로 한일 양국의 젊은이들을 모아 매년 두 차례 유골 발굴과 워크숍을 진행해 왔다. 시간이 지나며 중국인, 대만인과 아이누 젊은이들도 참여하게 됐다. 관람객에게 전시 내용을 설명해 주는 자원봉사자도 유골 발굴과 워크숍에 직접 참가했던 분들이다. 역사 속 피해자가 유골로 여기에 존재하기 때문에, 워크숍에 참가한 모든 사람들은 가해국과 피해국을 떠나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 죽은 자에 대한 공통적인 책임감을 느낀다. 여기서 참가자 간 우정도 싹튼다.”
-건물 재건에 총 6,000만 엔이 드는데 벌써 4,500만 엔을 모금했다.
“아직 목표액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이것도 큰돈이다. 과거와 달리 지금은 ‘조선인 강제 노역은 없었다’는 주장마저 하는 집단이 있을 정도로 일본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많은 분들이 기부를 하고 순회 전시회도 매일 수백 명씩 보러 오고 있어 고무적이다. 한국에서도 모금을 진행할 계획이다.”
-한일 관계 최대 현안인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에 대한 견해는.
“이 문제는 인간관계로 생각하면 간단하다. 피해자가 제대로 보상해 달라고 하면 가해자는 사과하고 지금부터라도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고 해야 끊어진 인간관계가 복원된다. 사과하고 보상하고 용서함으로써 다시금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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