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못한 호랑이처녀가 불행? 주체적 여성의 '시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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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못한 호랑이처녀가 불행? 주체적 여성의 '시조'입니다

입력
2022.09.03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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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성차별 사회는 어떻게 여성에게 결혼을 강권하나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역사 에세이스트 박신영 작가는 '백마 탄 왕자' 이야기에서 장자상속제의 문제를 짚어보는 등 흔히 듣는 역사, 고전문학, 설화, 속담에 배어 있는 성차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번갈아 글을 쓰는 이한 작가는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 활동가'로서 성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남녀가 함께 고민해 볼 지점, 직장과 학교의 성평등 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성차별적 사회구조가 한국의 낮은 출산율로 이어졌다는 외국의 분석을 담은 8월 27일자 한국일보 보도.

지난 8월 27일 보도된 한국일보 기사를 보자. 외신은 한국 출산율이 전년(0.84명)보다 떨어졌다는 점에 주목하며 성차별적 사회구조와 가부장 문화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여성이 독박 육아를 하면서 집안일도 혼자 다하는 낡은 현실에 대해 미국의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IE)는 "한국 사회구조상 한국 여성에게 결혼은 매력적인 선택지가 아니다"라고 꼬집기도 했다.

사실 한국 여성에게 결혼 생활이 매력적이었던 적은 거의 없었다. 조선시대 민요 '시집살이 노래'를 보자. "형님 형님 사촌 형님 시집살이 어떱데까?"라고 묻는 사촌 동생에게 친정에 다니러 온 언니는 답한다. "이애 이애 그 말 마라 시집살이 개집살이." 그렇다. 페미니스트와 메갈리아가 등장하기 훨씬 전에도 한국 여성들은 결혼이 매력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른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았기에 현실을 알면서도 결혼을 할 수밖에 없었을 뿐.

성차별 사회는 여성에게 결혼을 강권한다. 남성에게 여성을 한 명씩 공급해 줘야 하기에. 그동안은 어떤 방법을 썼나? 교육을 시키지 않고, 경제력을 빼앗아 남성에게 의존하게 만들었다. 여성에게 '결혼생활이 정글이라면 결혼 바깥은 지옥'임을 각인시키기 위해 가부장에 소속돼 있지 않은 여성에 대한 각종 폭력을 방조했다. 결혼을 안/못한 여성을 하자가 있어 남성의 선택을 받지 못한 여성, 불행한 여성으로 몰아가기도 했다. 그리하여 처음부터 여성들이 결혼 외에 다른 선택을 할 생각도 못하게 만들었다. 이 세뇌작업은 무려 우리나라의 건국신화에서부터 보인다.

결혼을 강권하는 '호랑이처녀=패배자'란 해석

2012년 3월 15일 서울 종로구 사직단 단군성전에서 단군이 승천한 날을 기리는 '어천절 대제'가 진행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단군신화'는 고조선 건국신화다.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의하면 환인의 아들인 환웅이 하늘에서 태백산으로 내려와 인간세상을 다스린다. 그는 풍백, 우사, 운사 등 농업을 관장하는 부하들과 같이 왔다. 이때 곰과 호랑이가 환웅에게 찾아와 사람 되기를 청한다. 둘은 동굴 속에서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말고 쑥과 마늘을 먹으라는 처방을 받는다. 곰은 삼칠일 동안 참아서 사람이 되었으나 호랑이는 참지 못하고 동굴을 뛰쳐나간다. 사람이 된 곰처녀는 아이 갖기를 원한다. 이에 환웅이 웅녀와 혼인한다. 둘 사이의 아들이 조선을 세운 단군왕검이다.

단군신화를 대강 읽으면 곰처녀는 환웅과 결혼하고 단군을 낳아 시조할머니가 되어 성공한 것에 반해 호랑이처녀는 패배자같이 보인다. 인내심이야말로 여성의 미덕인데 호랑이처녀에게는 그 미덕이 없어서 환웅의 간택을 받지 못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 구리구리한 해석을 교훈이랍시고 가르치는 사람들도 꽤 있다. 그렇지 않다. 이 호랑이처녀는 단군 건국 이후 반만년 역사에서 손꼽힐 만한 주체성을 가진 멋진 선배 여성이다.

단군신화는 설화 분류상 '천손강림(天孫降臨)형 건국설화'에 속한다. 하늘에서 천신의 자손이 내려와 그 지역을 지배하는 집단의 여성과 결혼하고, 그들의 자손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유형이 '천손강림형 건국신화'다. 천신의 아들 해모수와 수신 하백의 딸 유화 사이에 태어난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는 '동명성왕 신화'도 같은 유형이다. 하늘에서 내린 빛을 받고 잉태한 아이가 나라를 건국하거나 영웅이 되는 이야기도 천손강림형 설화의 변형이다. 제우스가 변신한 황금비를 맞은 다나에가 낳은 영웅 페르세우스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천손강림형 설화는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 온 집단과 그 지역 토착 세력이 연합정권을 만들어 지배세력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단군신화로 본다면, 하늘신을 섬기는 외래 민족과 곰과 호랑이를 토템으로 삼는 토착 세력이 결혼동맹을 맺어 새로운 나라를 세운 셈이다. 여기서 중요하게 볼 점이 있다. 외부에서 이주해 와서 성공적으로 정착한 집단은 앞선 기술이나 문화를 가졌다는 점. 3,000명에 달하는 환웅 일행 중에는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가 있었다. 비, 구름과 바람은 농경에 필수적이다. 이를 담당하는 관리가 있었다는 것은 환웅 일행이 앞선 농경기술을 갖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고조선이 청동기 국가였던 것으로 봐서, 선진 청동기 문명을 갖고 왔다고도 볼 수 있다.

정략결혼을 거부한 호랑이처녀의 주체성

이렇게 볼 때, 곰과 호랑이가 환웅을 찾아가 인간여성이 되기를 청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들은 각각 곰과 호랑이를 토템으로 삼는 토착 세력 부족장의 딸을 상징한다. 이렇게 곰과 호랑이를 토템으로 삼을 정도로 수렵과 원시농경에 의존하던 지역에 새로운 집단이 나타난 것이다. 그들은 하늘신을 믿는 부족이어서 족장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부른다. 충돌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외래 부족은 청동기와 농경문화를 가져온 선진세력이었다. 무력으로 당할 수가 없다. 토착 세력 부족장들은 모인다. 회의 끝에 결사항전보다 결혼동맹으로 의견이 모인다. 가장 힘센 곰 부족과 호랑이 부족에서 한 명씩 족장의 딸을 내놓기로 한다. 즉 곰과 호랑이는 정치적 목적에 따라 정략결혼에 등 떠밀려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환웅 앞에 나간 여성들인 것이다. 환웅은 두 처녀에게 동굴에서 쑥과 마늘을 먹으며 백일 동안 얌전히 있으라고 주문한다. 이에 호랑이처녀는 참지 않고 동굴 밖으로 뛰쳐나간다.

단군신화 속 호랑이처녀와 곰처녀. 게티이미지뱅크

멋지다. 호랑이처녀는 아버지와 부족이 강권하는 정략결혼을 스스로의 의지로 거부했다. 이렇게 보면 환웅이 곰처녀를 간택한 것만이 아니라 호랑이처녀가 환웅과 결혼하는 것을 거부한 것도 중요한 사실 아닌가? 그런데도 왜 곰처녀는 시조할머니로 숭배하고, 호랑이처녀는 역사의 패배자로 생각할까? 남성의 선택을 받지 못해 결혼하지 못한 여성을 불행한 여성으로 몰아가는 우리 사회의 성차별 편견 때문이리라.

일본에 '마케이누(負け犬 ; まけいぬ)'라는 유행어가 있었다. 2003년 출간된 사카이 준코(酒井順子)의 베스트셀러 수필집에서 유래한 말인데, '싸움에 진 개'란 뜻으로 결혼하지 않은 여성을 비하하는 용어로 쓰인다. 일본 사회의 여성 혐오 문화가 잘 드러난 말이다. 일본뿐인가, 우리나라도 그렇다. 오죽하면 최고(最古)의 건국신화인 단군신화에서부터 결혼하지 못한 여성을 문제 있는 여성으로 서술하고 있겠는가. 하지만 호랑이처녀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듯, 결혼하지 않은 것은 남성의 간택을 못 받은 것, 패배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결혼하지 않기를, 자신의 운명을 선택한 것이다. 어디 감히 싸움에 진 '개' 운운인가? 게다가 원래 '호랑이'인 것을!

한편, 기가 센 호랑이처녀라고 무조건 결혼은 싫어했을까? 아닐 것이다. 타인에게 도구로 이용당하거나 남의 기준에 맞추어 자신을 억압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본성을 그대로 인정받고 하는 사랑과 결혼이라면 다른 선택을 할 것이다. 생각해보자. 무려 호랑이인데, 굳이 약한 인간으로 변해서까지 결혼할 필요가 있었을까? 육식 취향인데 굳이 쑥과 마늘을 먹으며 참을성 있는 여성인지 아닌지를 시험받을 필요가 있었을까?

쑥과 마늘을 먹는 것에 대해서 '게세르 신화'에 서술된 내용을 소개하겠다. 게세르(Geser)는 동북아시아와 시베리아까지의 넓은 지역에서 구술되는 영웅 서사시의 주인공이다. 게세르 계열의 신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채록본은 단군신화다. 게세르의 어머니는 90세에 '야생파'를 먹고 불임을 치료해서 게세르를 낳았다. 삼국유사의 단군신화 원문에 나오는 '쑥과 마늘'은 '영애(靈艾)와 산(蒜)'이다. 산(蒜)은 마늘, 달래를 뜻하는데, 일연이 활동하던 고려시대에는 파나 부추도 의미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쑥과 마늘은 '임신용 보약'이었을까? 환웅은 두 처녀 가운데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여성을 원했던 것일까? 이렇게 본다면, 우리의 호랑이처녀는 아이 낳는 도구로 이용될 운명까지 떨쳐낸 것이니 더욱 멋지지 않은가?

운명을 개척한 호랑이처녀도 우리 시조다

다른 버전의 '단군신화'도 있다. 승려 설암(雪嵒)이 지은 '묘향산지(妙香山誌)'다. 여기에도 호랑이처녀가 등장한다. '환인의 아들 환웅이 태백산에 내려와 신단수 아래 살았다. 환웅이 하루는 백호와 교통하여 아들 단군을 낳았다(桓仁之子桓熊 降于太白山神檀下居焉 熊一日與白虎交通生子 是謂檀君).'

조선시대 승려 설암이 묘향산을 누비면서 쓴 '묘향산지'. 한국학중앙연구원

위의 이야기에서는 호랑이처녀도 우리의 시조할머니다. 그는 인간으로 변하지 않고 백호 그대로의 모습인 채 혼인하고 아이를 낳는다. 이 부분은 삼국유사의 이야기보다 더 이전 시대의 신화가 구전되다가 기록되었기에 아직 수성(獸性)과 인성(人性)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로 이야기에 등장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멋지지 않은가? 굳이 타인의 조건에 맞춘 몸이 될 필요 없이 자신의 본성을 유지한 그대로 상대를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고 출산한다는 것!

아무리 "요즘 여성들이 이기적이어서 결혼도 안 하고 아이도 안 낳는다" 운운해봐야 소용없다. "남자의 사랑을 받고 결혼하고 아기 낳아 키우는 것이 여자의 진정한 행복이다" 세뇌해봐야 안 통한다. 여성이 결혼과 동시에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하는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면야. 결혼제도 안에서 아기를 낳든, 혼외 출산을 하든, 결혼과 출산 모두 거부하든, 여성이 자신의 본 모습을 유지하며 도구로 이용당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운명을 선택하며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저출생 대책의 기본이다.

남성의 선택을 받지 못하면 인생의 패배자이며 결혼하고 아이를 낳지 못한 여성은 불행한 여성이라고 세뇌하는 것,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우리는 곰처녀뿐만 아니라 쑥과 마늘을 내던지고 동굴을 뛰쳐나가 숲속을 달린 호랑이처녀의 후손이기도 하다.

박신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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