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작고 평온한 지리산 산골마을의 퀴어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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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작고 평온한 지리산 산골마을의 퀴어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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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3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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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산내 성다양성 축제를 가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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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세 번째 열리는 산내 성다양성 축제는 풍물패 '이명풍물'의 길놀이로 시작을 알렸다. 정규 인원은 6명에 불과하고, 모두 현장에서 즉석으로 채를 잡은 이들이다. 단순하지만 힘 있는 호남좌도 가락이 울려 퍼지자 축제에 온 방문객들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행진했다. 지난 28일 전북 남원시 산내면 산내초교 운동장을 풍물패와 축제 참가자들이 돌고 있다. 남원=이혜미 기자

"아무리 퀴어(성소수자)를 혐오하는 사람이라도 이 시골까진 찾아올 수 없지 않을까?"

지난 28일 오후 7시 30분. 고산준령으로 첩첩이 둘러싸인 인구 2,700여 명의 작은 산골 동네 전북 남원시 산내면. 따사롭게 작열하는 초가을 해가 뉘엿뉘엿 지리산 뒤로 숨은 저녁, 산내초교에서 출발해 왕복 2.5㎞에 이르는 논둑길을 따라 50명 남짓이 행진했다. 무리 중 누군가 이렇게 말하자, 함께 걷던 이들은 "정말 그렇네!"라며 꺄르르 웃었다.

퀴어 퍼레이드 선봉에는 '산내 성다양성 축제'라는 표식을 붙인 수레 달린 자전거가 섰다. 이동이 불편한 참가자와 동행하기 위함이다. 1시간쯤 걸었을까, 대정마을과 입석마을 사이 하천을 가로지르는 다리 람천교에 이르러 단체 사진을 찍고 해산했다. 아마도 국내에서 가장 평화롭고 작은 규모의 퀴어축제일 '산내 성다양성 축제' 현장을 한국일보 허스펙티브가 찾았다.

지난 28일, 어둠이 자욱하게 깔린 소로를 따라 '산내 성다양성 축제' 참가자들이 행진하고 있다. 남원=이혜미 기자


'산내 성다양성 축제'에 없는 것들

① 화려한 오프닝 무대와 대형 앰프가 없다

28일 전북 남원시 산내면 산내초교 주차장에 무지개 깃발이 나부끼고 있다. 남원=이혜미 기자

남원역에서도 1시간 30분가량 버스를 타고 들어가야 도착하는 산골짜기 산내.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화려하고 개성 넘치는 복장을 한 젊은이들이 마을을 활보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아메리카원주민 머리장식을 하거나 터번을 두른 청년, 성별 고정관념을 넘나들며 펑퍼짐한 원피스를 입은 남성 등. 무지개 깃발 나부끼는 산내초교 주차장에 다다르자 이곳이 제3회 산내 성다양성 축제 현장임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오후 2시, 풍물패 '이명풍물'의 길놀이로 축제가 시작됐다. 산악지대에서 전승된 호남좌도농악 가락이 울려 퍼지자, 구경하던 사람들이 이내 행렬의 꼬리를 따랐다. 풍물패를 이끈 김주혜(46)씨는 "좌도 가락은 복잡하지 않아 많은 사람이 따라할 수 있다"며 "현장에서 원하는 사람들에게 악기를 빌려줘 즉석으로 함께한 것"이라 설명했다.

세계의 유명한 대규모 퀴어 축제와 달리, 산내 성다양성 축제에 화려한 오프닝 무대와 대형 앰프는 없다. 오로지 축제에 참가한 사람들의 환호와 노래만이 세상을 향해 외치는 울림통 역할을 한다.

"익명성이 담보되는 도시와 달리 시골에서 성소수자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고 사랑하는 것은 쉽지 않아요. 농경문화에 기반을 둔 시골 어르신들은 성역할을 구분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점이 성소수자 청년들에게는 답답함으로 다가오죠." 김씨는 풍물패 이름이 '이명(異鳴)'인 데도 '들리지 않는 소리를 내겠다'는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날 축제는 춤과 노래 등 공연을 펼친 놀이꾼 일곱 팀과 각종 물건과 음식을 내다파는 장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구성됐다. 커다란 스크린과 아기자기한 굿즈, 화려한 무대로 풍경을 꾸미지 않아도, 경이로울 만큼 푸릇푸릇한 자연만으로 흥을 돋우기에 충분했다.

3회 산내 성다양성 축제의 시작을 알린 이명풍물. 남원=이혜미 기자

② 강력한 연대발언은 없다. 그러나 뜨거운 포옹이 있다

"정말 오랜만이다. 그동안 잘 지냈어?"

축제 일곱 시간 동안 가장 자주 볼 수 있었던 건 오랜만에 만난 이들이 뜨겁게 포옹하는 장면이었다. 지난해에는 코로나19로 마을 관계자만 소규모로 모여 행사를 진행했다. 도시와 달리 넓게 흩어져 사는 생활 여건상 쉽게 만나기도 어렵다. 축제는 서로의 안위를 확인하고 안부를 묻는 장이나 다름없었다.

정푸른(29)·이종혁(36) 부부는 생후 43일 된 딸을 데리고 경남 산청에서 전북 남원까지 왔다. 정씨는 "지리산을 중심으로 다양한 활동가들이 연결되어 활동하는데 지난해에는 코로나 때문에 오지 못했다"고 말했다. 딸의 이름은 '서로'다. 정씨는 "이 축제에 왔던 기억은 없겠지만, 이름처럼 다양성을 존중하고 '서로' 돕고 어울리는 사람으로 컸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전남 구례에서 6세 아들 손을 잡고 온 김유현(32)씨는 "작은 동네에서도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를 하고 사람들이 모일 수 있어 좋다"며 "아이에게 다양한 친구들을 만나게 해주고 싶어 산내까지 왔다"고 했다.

지난달 서울광장에서 열린 서울퀴어문화축제의 백미는 성소수자 인권을 지지하는 외교관 모임의 연대발언이었다. 특히 필립 골드버그 주한 미국대사가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계속 인권을 위해 싸울 것"이라 외친 장면은, 소수자 혐오로 얼룩진 한국 사회에 큰 울림을 줬다.

그러나 산내 성다양성 축제에서 비장한 규탄 메시지나 강력한 연대 발언, 혹은 많은 사람이 참여한 지지성명 같은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산 위로 무지개 떴다/ 우리는 사라지지 않을 거야/ 강 너머 무지개 떴다/ 우리는 사랑을 말할 거야." 스스로 만든 노래에 맞춰 다같이 춤추고 노래하며 즐길 뿐.

"처음부터 성소수자 권리를 널리 알리는 목표의식이나 상징성을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어요. '이곳에서만큼은 내가 하는 사랑, 네가 하는 사랑 어떤 형태든 다 괜찮으니 마음껏 즐기라'는 마음을 나누고 싶었죠. 혹은 '다들 잘 지냈어?' 안부를 묻는 공간이 되거나요." 축제를 기획한 상글(본명 박소연·33)씨가 말했다.

산내 성다양성 축제는 공연자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뤄졌다. 귀촌 프로그램으로 지리산권에 정착하게 된 청년들은 스스로 축제를 기획하고, 노래를 직접 만들어 무대에 오르기도 한다. 남원=이혜미 기자

③ 배제와 위계가 없다

왜 '퀴어' 축제가 아닌 '성다양성' 축제일까. 이는 대다수 주민이 주로 농사 짓는 노인들로 이뤄진 지역 특성 때문이다. 요즘 지리산권은 페미니즘·동물권·생태주의 등 대안적 삶을 지향하는 이들이 귀농 혹은 귀촌하는 곳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래도 '퀴어'라는 말이 생소할 수밖에 없는 곳이다.

당초 성다양성 축제 역시 귀촌 프로그램을 통해 2020년 전후로 산내면에 정착한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졌다. 당연히 세대·출신별 주민 간 인식차는 크다. 동성 연인과 손을 잡고 가는 모습을 보고 마을 어른들은 "친구끼리 우애가 깊다"고 말하고, 청년들이 새로 이주하려 집을 구할 때 '민소매 입고 다니지 마라'며 마을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 젊은 여성이 레즈비언인 줄 모르고 "옆 마을 총각이랑 중매를 서겠다"는 주민도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퀴어'라는 단어가 주는 이질감은 상당하다.

칩코(본명 이신지원·28)씨는 "시골에는 영어는커녕 한글도 읽지 못하는 분들이 있는데 영어를 쓰면 자연스럽게 배제되는 사람이 생긴다"며 "게다가 마을 주민들께 '퀴어'라는 단어는 너무 어렵게 느껴지는 측면이 있어 최대한 이해가 쉽도록 작명을 고안했다"고 말했다.

상글씨와 칩코씨는 주도적으로 축제 기획 업무를 맡았지만 '기획단'이나 '준비위원회' 같은 식으로 호명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직함에서 비롯되는 위계나 권위 없이 모두가 평등하게 참가하길 바라서다. 대신 축제를 준비하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한 이들을 모두 '코딱지'라 부른다. 이번 축제 역시 휴대폰 메신저 오픈채팅방을 통해 코딱지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봉사로 진행됐다.

축제를 찾은 아이의 손에 비건식으로 만들어진 무지개 쿠키가 쥐어져 있다 남원=이혜미 기자

④ 반대를 외치는 혐오 집단이 없다

100명가량 모이는 작은 축제를 방해하기 위해 고출력 확성기를 들고 산골까지 찾아오는 열정적인 성소수자 반대 집단이 있을까. 축제 그 자체를 반대하고 훼방하는 반대 집단이 없다는 것. 58개 중대 규모의 경찰을 배치해 서울광장을 둘러쌌던 도시의 퀴어축제와 시골의 작은 성다양성 축제가 구분되는 지점이다.

이날 처음 축제를 둘러봤다는 주민 홍순원(66)씨는 "이런 축제는 해외토픽 같은 곳에서만 접했었고 문란하다는 혐오나 편견이 많았다"면서도 "축제에서 따뜻하게 서로 포옹하는 젊은이들을 보니 굉장히 자유롭고 순수해보였다"고 말했다.

물론 환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후 8시 30분쯤 모든 행진을 마친 뒤 칩코씨는 "시끄럽다는 주민 신고가 들어왔다"는 경찰 전화를 받았다. 마을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일부러 인가가 없는 논둑을 주로 걸었지만, 항의를 피할 수 없었다.

기존 마을 주민의 참여를 이끌어내고 화학적으로 어우러지는 것은 또 다른 과제로 남는다. 축제 당일 마을 내 식당 주인도, 편의점 계산원도, 버스 기사도 "오늘 저기서 뭐해요?"라는 반응을 보였다. 축제가 열리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 듯했다. 축제 인파 속에서도 마을 주민을 찾기는 어려웠다. 상글씨는 "외부 손님에 비해 마을 주민의 참여가 적은 것이 아쉽지만, 평소 주민들로부터 '무지개 축제 잘하고 있어?'라는 관심 어린 질문을 종종 받는다"고 말했다.

'코딱지'들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열리기에, 매년 축제는 다음을 확실히 기약하지 못하는 처지다. 특히 축제를 주도적으로 기획한 청년들이 산내에서 집을 구하지 못해 인근 구례 등으로 이주하면서 시계가 더욱 불투명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이 시골 마을에서 퀴어 축제를 이어가는 마음은 무얼까.

청년들이 농촌에 잘 오려고 하지 않잖아요. 농촌에서도 즐겁게 살면서 새로운 활동을 작당할 수 있다는 걸 축제에 온 사람들이 흠뻑 느끼고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축제를 통해 '어떤 형태의 사랑도 축복하고 존중해. 우리 같이 살고 있어'라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다양성을 존중하는 문화 속에서 농촌에 더 많은 청년들이 와서 살 수 있기를 바라요.

상글





남원=이혜미 허스펙티브랩장 herst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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