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54분, 여자의 187분...여성의 잃어버린 '2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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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54분, 여자의 187분...여성의 잃어버린 '2시간'

입력
2022.08.27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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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집'에서 일하지 않는 남성에게도 재생산노동을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역사 에세이스트 박신영 작가는 '백마 탄 왕자' 이야기에서 장자상속제의 문제를 짚어보는 등 흔히 듣는 역사, 고전문학, 설화, 속담에 배어 있는 성차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번갈아 글을 쓰는 이한 작가는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 활동가'로서 성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남녀가 함께 고민해 볼 지점, 직장과 학교의 성평등 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게티이미지뱅크

2019년부터 지금까지 프리랜서로 살고 있다. 그 과정에서 외로움과 불안함 등 다양한 역경과 싸우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제법 적성에 잘 맞는다고 느낀다. 특히 갓 프리랜서로 재택근무를 시작했을 당시에는 마냥 좋았다. 출퇴근길에 낯선 사람과 부대끼지 않아서 좋았고 자체 탄력근무제로 낮 시간에 볕을 맞는 게 행복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사치는 직장인 친구와 술을 마신 후, 숙취로 고통받는 친구의 출근길을 이불 속에서 배웅하는 것이다. 행복이란 멀리 있지 않다는 걸 새삼 느낀다.

그렇다고 어려움이 없지는 않다. 특히 일과 생활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게 참 어렵다. 그다지 부지런하거나 깔끔떠는 성격이 아님에도 집이라는 공간은 사람 손길이 참 많이 필요했다. 일하다 말고 끼니를 챙기고 벌레가 생기지 않게 치우고, 글을 쓰려고 앉아서 밖을 내다보다 괜히 창틀에 쌓인 먼지를 닦아내고, 강의안을 짜다말고 반려묘의 응석을 받아주다 보면 어느새 하루는 끝나가고 마감이 목을 조른다. 그저 깨끗한 빤쓰를 입고 양질의 영양분을 섭취하며 안전하고 청결한 환경에서 살아남고 싶을 뿐인데, 이를 위해 필요한 가사노동이 자꾸만 임금노동의 세계를 침식해 들어왔다.

결국 나는 근처에 공유 오피스를 구해 도망쳐 나왔다. 덕분에 일은 그나마 쾌적하게 하고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이 될 수는 없다. 내가 공유 오피스에서 외면하고 있는 동안에도 집에는 밀린 빨래와 유통기한을 넘겨 냉동고로 유배된 정체 모를 음식물, 심심해하는 반려묘와 낡아가는 집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집 밖에 나설 수 있게 하는 일(소위 말하는 집안일, 재생산노동)과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는 일(소위 말하는 바깥일, 생산노동)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게 좀처럼 쉽지가 않다.

필수적이고 근본적이지만 등한시되어온 재생산노동

이게 어디 나만의 문제일까. 주변 자취인의 몰골은 늘 말이 아니라서, 간혹 유복하고 덕망 넘치는 친구가 자취인에게 소량의 과일, 야채를 하사하곤 했다. 오늘날 같은 영양과잉의 시대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지만, 이는 결코 유별난 일이 아니었다. 나를 비롯한 많은 청년에게 자기 개발은 익숙해도 자기돌봄 같은 재생산노동은 낯선 경우가 많았다. 성적 잘 받고 좋은 스펙과 커리어를 쌓아 돈 버는 건 권장됐으나 빨래를 분류해서 돌리고 분리배출을 위해 페트병에 붙은 라벨을 떼고, 부엌을 쓴 후 싱크대에 물기가 없게 관리하는 일은 가소롭고 하찮게 여기는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변기는 저절로 깨끗해지지 않고, 세탁기와 건조기가 있어도 빨래는 사람이 돌려야 하며, 식료품 및 생필품의 재고를 가늠해서 틈틈이 채워 넣어야만 한다. 더러운 빤쓰만 입고 강의할 수 없고, 편의점 삼각김밥만 먹고 글을 쓸 수는 없으니까.

게티이미지뱅크

그럼에도 재생산노동의 위상은 늘 생산노동에 미치지 못했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재생산노동을 여성의 전유물로 여긴 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책 제목처럼 '부엌 청소로 오르가즘을 느끼는 여자는 없다'지만, 그것을 마치 여성 고유의 역할인 것처럼 여기고 또 함께 멸시했다. 그러나 우리는 돈을 입거나 먹고 살 수 없으며 제아무리 강한 사람도 돌봄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재생산노동이야말로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의식주의 근간이자 가장 근본적이고 필수적인 요소다.

재생산노동에 무임승차한 사람들의 비극적인 종착지

그런데 만약 지금까지 쓰인 재생산노동이 낯설거나 스스로 챙겨 본 경험이 드물다면, 그것은 당신이 지금까지 재생산노동에 무임승차했다는 의미다. 무임승차라는 표현이 너무 심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자. 청소, 요리, 돌봄 등 재생산노동을 전담하는 이와 생산노동자의 역할을 바꿀 수 있는가? 생산노동과 재생산노동의 1분은 우리 사회에서, 당신의 마음에서 같게 취급되고 있는가? 재생산노동의 값어치는 어떻게 책정됐는가?

그래픽=송정근 기자


2019년 기준, 맞벌이 가구의 하루 평균 가사노동시간은 남자가 54분, 여자가 187분으로 여성이 133분 더 많다. 남성 역시 생산노동으로 가정에 이바지하며, 이것은 나름 합리적이고 공정한 역할 배분이라 믿고 싶겠지만, 그런 환상은 위 수치와 물음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감추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우리 사회는 무수히 많은 여성의 재생산노동에 무임승차하고 있다.

만약 당신이 생산노동에서 은퇴를 앞두고 있거나 은퇴한 이후라면 살림하는 사람도 함께 은퇴할 수 있을까? 은퇴한 중장년 남성이 집에서 '삼식이'라 불리며 구박받는다는 자조적 은어 뒤에는 남편이 은퇴한 이후에도 중장년 여성은 재생산노동에서 은퇴하지 못한다는 무시무시하고 비극적인 현실이 숨겨져 있다. 이런 상황이 오래 지속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2021년 무연고 사망자 통계 *자료:보건복지부,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실


40세 미만5719
40~49세21755
50~59세60859
60~69세886109
70세 이상875497
합계2,643739

30대에 접어든 주변인들 사이에서 부모가 불화하고 갈등하다 갈라섰다는 소식을 심심치 않게 듣는다. 혼인관계는 유지하되 각자 자유롭게 사는 '졸혼'이라는 신조어가 떠오르고 황혼이혼 역시 10년 새 2배 이상 증가했다고 한다. 단순히 같이 살만큼 살았으니 이제 갈라서서 각자 제2의 인생을 찾아 나서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응원하겠지만 마냥 박수치기도 어려운 건, "무연고 사망자의 75%가 남성"이란 통계가 겹쳐보이기 때문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지난해 무연고 사망자 3,488명 중 2,643명이 남성이었다. 가장 많은 건 60대 남성(886명)이었다.

경제적으로 더 열악한 다른 성별, 세대군보다 유독 중장년 남성이 고독사에 더 취약한 것은, 그만큼 이들이 스스로를 돌보거나 가정과 주변 관계에서 유대관계를 쌓는 데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다. 마냥 개인만의 탓이라 할 수 있을까. 많은 중장년 남성이 가부장제 사회에서 살아가며 돈 버는 것만이 남성의 역할이라고 보고 믿고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남성성 굴레의 종착지가 비극으로 치닫는 상황에, 이제는 종지부를 찍고 변화를 말해야 한다.

남성에게 재생산노동을!

게티이미지뱅크

이를테면 남성의 육아휴직 사용을 권장하는 정책이 있겠다. 2020년 전체육아휴직자 중 남성 육아휴직자 비율은 24.5%다. 많이 늘어난 수치라고 하지만, 여전히 절반에 이르지 못했다. 누군들 육아휴직을 안 쓰고 싶을까. 자녀의 일곱 살은 오직 그때 1년뿐이다. 유보되지도, 다른 기억으로 대체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남성이 육아휴직 신청을 주저하는 건, '승진 포기했냐'는 주변인의 눈초리와 구시대적 가부장제 문화 탓이다. 스웨덴은 이러한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남성 육아휴직 할당제와 같은 정책을 도입했다. 총 480일의 부부육아휴직 중, 90일은 남성이 쓰지 않으면 사라지게끔 함으로써 남성의 육아휴직률을 높였다. 이러한 돌봄 경험은 남성들로 하여금 재생산노동의 가치를 피부로 느낄 수 있게 하고, 나아가 가족과 유대를 쌓는 데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가 여성에게 생산노동을 권장한만큼, 이제는 남성에게 재생산노동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참여할 수 있도록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

물론 나아가야 할 길은 멀고 험난하며 변화는 때로 더딜지 모른다. 하나 재생산노동은 한 사람이 성장하는 과정에 수많은 사람의 오랜 품이 들어간다는 것 역시 알려주었다. 그러니까 긴 호흡으로 함께하자. 내가 집 안팎에서 제 몫을 하는 1인분의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게끔 나를 떠먹인 숟가락들을 기억한다. 그들이 나를 먹여 살렸듯, 이제는 내가, 당신이 숟가락을 들 때다. 잊지 말자. 태초에 재생산노동이 있었다.

이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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